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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Dec 15. 2023

금지당한 상처의 치유

존엄성의 보존으로써의 치유

“개인적 관계나 사회적 관계에서 얻는 

자신감과 칭찬, 사업에서의 성공, 기분전환, 즐기기, 교제하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완전히 덮어서 가려버린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비쳐오지 않는다.

고독감, 두려움, 당혹감은 그대로 남는다”     


 현대인들에게 어떠한 활동들은 공허함을 마주할 때의 당혹감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내재적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과열한 외재적 활동으로 동기를 유지하려는 특성이 있고, 내면의 결핍을 마주할 어떠한 기회도 허락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혹사하기도 한다. 때로는 취미로 불려질만한 것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 결핍을 덮기 위해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타인 혹은 자기를 학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프롬은 인간이 지각하는 ‘비극의 감정’을 특별히 언급한다. 삶의 비극과 관련한 인식은 막연한 것이든, 명료한 것이든 인간의 기본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의 합이 상처를 받는 시간의 양과 비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전과 다른 반응을 하거나, 더 강렬하게 숨기거나, 열심히 다른 곳에 눈을 돌림으로써 상처에 둔감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일흔을 넘겨 상담사로서 수십 년의 경력을 가진 어느 선생님은 아직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어려워진다고 하였다. 무수한 임상의 경력을 가진 사람도 자기 상처 앞에서는 여전히 어린 아이가 될 수 있다. 경험이 쌓여 전문가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은 상처를 상처로 인지하고 인정하며 그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덜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직면한다는 것, 상처를 잘 보듬고 자기를 위로한다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자해를 몇 번 시도했던 내담자가 있었다. 그에게 자해란 자신의 상처를 폭로하는 일이자, 결핍의 당사자로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기불안이 심했던 그는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배가 찢어질 정도로 음식을 먹어댔다. 그래서 체중이 20kg 증가했고 친구들과  ‘미라클 모닝’을 통해 살을 빼려고 애썼다. 남들은 일어나기도 어려운 시간에 일어나니 그야말로 누군가에게는 미라클일 수도 있는 일을 매일 실천했다. 처음에는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남들로부터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는 것에 점점 매료되었다. 그렇게 행위에 빠져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모두 체중감량에 성공했지만 그는 전혀 체중을 줄일 수 없었다. 친구들이 치열하게 지키는 식단도 그는 전혀 지키지 않았다. 그에게는 미라클 모닝을 한다는 행위 자체, 남들에게 받는 칭찬이 의미가 있었을 뿐 그에 따르는 어떠한 노력도, 고통도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행위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을 때, 체중 감량에 대한 칭송을 자기 혼자 받지 못했을 때 그는 다시 자해를 시도했다. 결국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면 그 행위 밑에 있던 심리적 갈등은 고개를 내밀게 되어있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가 자신의 열등감을 완벽주의로 덮고, 유기불안을 타인을 통해서 극복하려 애쓰고, 자해를 통해 어린 시절 상실한 돌봄을 보상받으려 하고, 심리적 허기짐을 음식으로 채우려는 억압의 방식을 동원한 문제 해결이 아닌 상처를 잠잠이 바라보고, 내적 동기와 자원을 찾고 고통을 껴안고 감내하려고 노력하였다면 자신을 해치지 않고 해방하였을 것이다.


억압이 항상 그렇듯이, 억압된 요소는 시야에서 사라져도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문화적 행동으로 변하는 것을 승화라고 불렀고, 개인이 승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인간은 신경증에 걸리기 때문에 억압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상처를 승화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행위에 몰두하고 완벽주의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여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경쟁사회에서는 무력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모든 일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 훨씬 더 쓸모있는 행위로 간주된다. 대한민국이 이토록 빠르게 경제적·문화적 성장을 이룬 것도 민족적·사회적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으로부터 당한 식민 지배, 6·25 전쟁, 5·18 등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지하철참사, 세월호 사건 등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치유하는 과정은 상실하고 전투적으로 열심히 삶으로써 상처의 흔적들을 가려왔다. 전 국민이 번아웃에 시달리다시피 하는 것도 개개인이 국가적 트라우마를 지우는 데 이용되어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인간의 행위는 언젠가는 멈출 날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제야 무언가에 몰두하느라 가려졌던 상처와 대면하게 된다. 


 가끔 상담실에서 만나는 내담자들 중에는 상처를 꺼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갑자기 상담실을 찾지 않는 이들이 있다. 제 발로 상담실을 찾았지만 막상 내면을 마주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안위한다. 여태까지도 덮어두고서 잘 살아왔다고. 방금 전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몸서리쳤으면서도 말이다. 최근에 만난 내담자도 이러했다. 내담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렸는데, 그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이 가족 모두의 불문율이었다. 아무도 먼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다 같이 슬퍼하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눈치 보느라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슬픔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는 상담사에게라도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다는 것을,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다는 것을, 가족 모두가 침묵하는 것에 화가 난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표현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여태 참아왔던 모든 슬픔이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고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태연히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에 몰두했다. 자기 자신은 잊은 채로.


 인간은 종말을 향해 가는 존재이고, 죽음은 살아있는 실체의 당연한 숙명이지만, 그것이 나의 일 혹은 가족, 주변의 일이 될 때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슬픈 일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적인 죽음의 사건을 마주할 때 함께 연대하기도 한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연대하여 슬퍼하는 것은 애도 과정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살아있었던 순간을 추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슬픔과 기쁨은 함께 있어야 절망만이 그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슬픔은 거세당하고야 만다. 같은 슬픔, 공유하는 아픔 앞에서도 홀오 있어야만 한다. 


개인은 일단 자부심과 존엄성을 잃어버리면 심리적으로 중세적 사고,
즉 인간과 그 영적 구원과 정신적 목표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생각의 특징이었던 감정을 기꺼이 잃을 준비가 되어 있다

 

 프롬은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기에 광범위하게 박탈당했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 훨씬 더 광범위한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자본 축적과 생산성의 달성, 외부의 활동에 자신의 삶을 종속하고 고독한 자신을 마주할 시간을 스스로 빼앗는다. 슬퍼할 자유, 울며 하소연할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특권을 내려놓는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잃는다. 한 번의 실패에도 주저앉고서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기까지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존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존엄한 주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싶을 때도 있고, 엄마를 찾고 싶을 때도 있으며, 어른이 된 이후의 버거움에 휘청이기도 한다. 작아진 부모의 뒷모습이 처량하면서도 그 부모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떤 선택들 앞에서는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해 줬으면 싶기도 하다. 결혼하는 게 두렵지만 또 막상 남들이 누리는 행복을 누려보고 싶기도 하다. 20대일 때보다 힘이 빠진 내 모습에 우울할 수도 있고, 이대로 40대를 맞이할까 봐 조급해질 수도 있다. 동태적이면서도 정태적인 존재의 모든 모습을 승인하는 것, 이러한 모든 흔들림을 비겁한 두려움으로 보지 않는 것이 나는 감히 존엄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들에게 기억되는 죽음은 그가 존엄한 주체로서 살다 갔다는 흔적이라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마음껏 울고 기억하면서 존엄했던 이와 존엄한 이로서 만나라고.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상실했던 하지만 여전히 치유를 희망하는 존재성을 발견하라고.


 아들러는 인간이 어떤 가면을 오랜 시간 쓰고 있으면 중년의 때가 되어 위기를 맞는다고 경고했었다. 그때 맞는 위기는 우리를 더 벼랑 끝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행위, 목적 등에서 잠시 틈을 내어 몹시 바쁜 나머지 마주할 수 없었던 고독을, 상처를, 외로움을, 울음을 들어야 한다. 당신은 지극히 존엄한 주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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