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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유효기간

by 요술램프 예미

“엄마가 언제까지 그 얘기를 할 거냐고. 이제 그만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그래서 가족들 앞에서는 애써 밝은 척을 해요.”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또 누군가는 묻는다. 그 슬픔은 언제까지 갈 건지를. 그리고 충고한다. 이제는 슬픔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고.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보면 어느새 잊힌다고. 어떤 질문은 상처이고, 어떤 충고는 좌절이다. 슬픔을 간직한 이도 대답할 수 없다.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도 심판관이 되는 날카로운 시선과 말들이 서늘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슬픔을 감춘 채 애써 밝은 척을 하고, 어떤 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혼자 슬픔을 끌어안는다.


오래 가도 되는 슬픔은 어떤 것일까? 그만하면 되었다는 건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서 시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1년 전 당한 성폭행은 1년이 지나면 그만 말해야 하는 정도의 사건일까? 내담자는 1년 전 같은 직장의 동료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여전히 법적 공방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가족들에게 쉽게 슬픔을 표현할 수 없었다. 상담사인 내게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해주는 순간조차 내담자는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슬프고 아프며 그래서 암담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얼굴은 웃고 있는 내담자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그것이 상처를 숨기려 애쓴 지난날의 노력 같아서. 심지어 어떤 내담자들은 자신이 웃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그래서 말의 내용과 표정이 불일치한 내담자들을 보면 그렇게 밝아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상담사에게만큼은 있는 그대로 보여도 괜찮다고 안심시켜 준다. 그렇게 안심을 시켜주면 이후로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이 애써 웃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지난날이 얼마나 슬펐었는지 느끼고 말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벗어나야 한다는 말에 화가 났어요. 나는 아직도 이렇게 아픈데...”


아직도 아프다는 말, 가족들의 반응에 화가 났다는 내담자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화라는 표면적인 감정을 직면했다는 것은 그 아래에 숨은 감정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비로소 슬퍼하고 울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인 앞에서 울 수 있다는 것은 내 상처와 타인의 상처를 연결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담자와 상처와 시련, 그래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과거의 어느 때를 애도하는 시간을 함께 하며, 나는 기꺼이 상처의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어준다. 한 명은 치료자이고, 한 명은 내담자라는 이분법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비슷한 상처를 안은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것이 바로 상담이다. 상처와 슬픔은 데칼코마니 같아서 그 사건을 꼭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상처입은 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이 공감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본인이 가장 큰 상처를 입고도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는다. 지켜보는 이들이 자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해하였기에 내가 현재 아프고 슬픈 거라면 그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한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다. 지켜보는 이들이 아픈 이유도 나 때문이 아니라 불시에 당한 사건 때문이다. 물론 사랑하는 누군가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큰 고통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상처의 당사자에게 그 몫을 떠넘기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네가 알아서 슬픔을 잘 숨기라고. 그렇게 상처 앞에서 우리 모두 심봉사인 체 하자고.


때로는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사건의 원인을 애먼 데서 찾으며 슬픔을 가중한다. 몇 명의 주변인들은 내담자에게 왜 늦은 시간에 직장 동료와 함께 있었느냐고, 내담자가 그럴 만한 계기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고 쑥덕댔다. 이는 데이트 폭력을 당하거나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강간을 당하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건의 피해자들이 종종 듣는 말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그럴 만한 일을 자초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사건의 원인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돌리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의 얼굴이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사람에게 그것이 모두 너의 탓이라고 하는 것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상처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돼버리니까 상처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용서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본인이라고 믿으며 자책하라는 것이 아닌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조차도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모든 게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사랑이 막상 내 일이 되면 모든 것이 흐리다. 쿨하지 못하다. 애초에 내 것은 모든 것이 어렵고 쿨할 수 없다. 타인의 상처를 돌보는 상담사들도 자신의 상처를 도무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허다하다. 상처를 객관화하고 분석하고 관찰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남의 상처에 깊숙이 베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사실, 남의 상처에 내가 쿨한 것은 쿨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타인의 상처 앞에서 어설프게 훈계나 조언을 하는 것도, 나의 상처 앞에서 의연하거나 태연하지 못하다고 해서 자책하는 것도 그만 멈추어야 한다.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찢기고 피 흘리는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아플 수 없다. 그러니 나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자기 슬픔을 대상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어릴 적, 자신의 엄마를 부르며 우는 어른을 본 적이 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엉엉 우는 어른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내 눈에는 그렇게 우는 어른들이 이상했다. 어린 나를 붙들고서 과거를 하소연하던 엄마도 이상했고, 회상에 젖어 눈물을 적시던 아빠도 이상했다. 어린이였을 때 겪었던 일이 어른이 되어서도 아프다는 것이 이상하고 의아했다. 상처는 흘러가서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때의 어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슬픔은 어른이 된 현재에 가장 무거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면 상처같은 건 안 받는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받는 상처가 때로는 더 힘들 수도 있다. 아이일 때는 힘이 약해서 그렇다고 안위할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상처받는 내가 더 무겁다. 슬픈 역사의 총체로서의 현재의 내가 모든 슬픔의 합을 짊어지고 있기에, 지금 겪는 슬픔은 하나의 슬픔이 아니라 모든 슬픔에 더해진 슬픔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어릴 때보다 더 서럽게 우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따돌림의 유효기한이 30년이라고 논했다. 물론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보다 짧을 수도 있다. 학자들이 굳이 어떤 사건의 유효기한을 논하는 것은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슬픔의 기한이 한정되어 있다고, 언젠가는 그 기한이 다가오면 슬픔이 끝날 거라고 위로해 주기 위함이자, 그 정도의 기한이 지나지 않았거든 슬픔에 대해 감히 논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기 위함이다. 그 기한이 지났대도 왜 아직도 슬프냐고 비난해도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물어야 한다. 오늘은 얼마나 아픈지. 그리고 말해야 한다. 오늘은 얼마나 슬픈지. 그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나의 인간됨을 기억해야 한다. 헤아릴 수 있는 슬픔과 헤아릴 수 없는 슬픔 사이에서 의지를 갖고자, 이겨내 보고자 노력하는 스스로의 생명력과 존엄을 격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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