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드러낼 기회를 주세요,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미국에 어떤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나름 부유하고 좋은 집에서 장녀로 자랐다. 공부도 잘 하고, 후에 결혼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잘 살던 중 흐르는 수돗물을 바라보며 섬광처럼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욕실에서 아버지가 샤워를 하면서 그녀의 손을 아버지의 신체 어딘가에 대고 있던 기억이었다.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다 그녀의 머릿 속에 잊혔던 기억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몇십 년이 지나서야 그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그 전까지 그녀는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했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오랫동안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를 고소한 후 배상금을 받아내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수 십년이 지나서야 이런 기억이 떠올랐던 것일까. 왜 그 전에는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아이들은 자신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 생존하기 위하여 자신의 기억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버릴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 중 대표적인 억압이라는 방어기제가 미국의 그녀에게도 작동했던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철저히 억압하여야지만 당장에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정작 문제를 겪고 있는 어린 시절보다 어른이 된 후에 문제의 파편들이 드러나면서 더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 기억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억압된 기억들이 터져나오면서 비로소 그 문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보다 결혼한 이후에 지난 날의 고통으로부터 더 벗어날 수 없고, 그 고통에 더 매몰되어 버리는 내 자신에 대한 답도 조금 나오는 듯 했다. 부모로부터 그런 보호를 받지 못하다가 내가 부모가 되어 누군가를 보호해줘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니 그 때의 내 모습과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기도 하고, 억울한 어린 자아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어렸을 때 아빠로부터 수차례 폭력을 겪어도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고 따랐던 내 자신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또 어떤 여인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엄마가 아빠의 친구와 침실에 있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엄마는 절대 비밀로 할 것을 그녀에게 명령하였다. 이후에도 그런 사건들이 몇 번 더 있었지만, 엄마의 명령대로 아이는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기억 저 편으로 묻어버렸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 사건들을 기억해 내지 못하였다. 심지어 대학생이 된 이후에 자신의 엄마가 또 그리 하고 있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가해졌던 엄마의 명령은 그녀에게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들을 봉인해 버렸다. 그것을 기억하는 순간 불행의 늪에 빠질 것은 누가 보아도 뻔한 것이었기에 그녀의 무의식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들을 철저히 억압해버린 것이다. 먼 훗날 상담을 받으면서 그녀의 무의식에 있던 기억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고통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서로의 고통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고통의 강에서 허우적대게 되었다.
두 여인 모두 어렸을 때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다 큰 이후에까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 심지어 한국의 그녀는 성인이 된 이후에 펼쳐졌던 순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 어느 순간 어떤 계기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이 한 꺼번에 터져 나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미국의 그녀에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 가족이 있었고, 한국의 그녀에겐 그를 외면하는 가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그리고 그 둘의 더 근본적인 차이는 미국의 그녀는 금전적인 배상을 받든 어떻든 자신의 문제를 공론화하여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졌고, 한국의 그녀는 사회적 체면을 중시했던 그녀 아버지의 함구령으로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어른이 되어서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상처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기억과 화해하였다. 더 이상 그 기억에 얽매여 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옛날과 화해하였고,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과도 화해하였다. 그녀를 보며 어쩌면 나는 그녀보다는 덜 비극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의 옛날과 화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일은 아니다. 화해할 대상이 없는 지금 인간의 불완전함과 화해해야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부모가 가진 상처의 대물림은 그 어떤 유전적인 것을 뛰어넘어 자식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그렇다. 지난 날이 불행하였다고 앞으로도 불행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기에.
왜 나에게 그런 부모를 주셨는지, 왜 내게 그런 경험들을 주셨는지 너무 억울해서 한 때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다. '주여, 너무 억울해서 이 생을 끝내고 하늘 나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생을 허락하셔서 좋은 집 안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 내 지난 날을 보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세요. 대신 지금의 이 모습 이대로 태어나 나를 위로하게 해 주세요.' 참, 누가 들으면 비웃을 수 있는 기도였다. 그 어리석었던 기도가 이렇게 바뀔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옛 것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
'지난 날은 좋지 못하였으나, 비록 내 부모는 좋지 못하였으나, 좋은 남편과 착한 아이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으로 인해 내 상처를 보듬게 하시고, 자식으로 인해 부모의 역할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에게 이렇게 소중한 존재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로운 지난 날을 이렇게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부모가, 아내가, 또 사람이 되기 위해 옛 것을 버리고자 하오니, 저의 마음 밭을 비옥하게 가꾸어 주소서'
우리가 과거에 발목 잡히기로 마음 먹는 순간, 내 곁의 수 많은 사람들을 소란한 나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게 된다. 나만의 아픔이었던 것을 이제는 모두의 아픔으로 만들어버리고야 만다. 모두가 지옥 그 자체가 된다. 미국의 그녀처럼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단절을 선언해야만 한다. 나의 어린자아를 진정 위로할 수 있는 길은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데에 있으며 현재의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데에 있다.
과거에 발목 잡히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체 하라는 말은 아니다. 과거의 역사의 주인은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인 자신의 몫을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또 그걸 위로하는 자신의 몫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지, 남의 역할에 대해서까지 넘보지는 말아야 한다. 혼자서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가족이, 그 중에서도 남편이 혹은 아내가 그녀 혹은 그를 있는 있는 힘껏 안아줄 수 있다면 고통에서 꺼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제가 되지는 않을까.
고통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상처가 드러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세요.
과거의 상처라고 과거의 사람에게만 맡겨두지 마세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자기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