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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없던 우동의 맛

내 인생 제일 맛없던 우동을 삼키던 날

by 요술램프 예미

병원 앞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시켰다.

너무 어린 아가씨였던 나는 평생 처음으로 포장마차라는 곳엘 갔고, 평생 처음으로 우동을 혼자서 먹었다. 늦은 밤 그곳에는 술을 마시는 아저씨들 뿐이었고 그 시간에 고파진 내 배를 원망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 늦은 밤에 우동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내 생애 가장 맛없었던 우동이었다. 너무너무 맛이 없었지만, 내 슬픔을 삼키듯, 내 외로움을 삼키듯 하나하나 꼭꼭 씹어 삼켰다. 그 당시에 수년을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그 외로웠던 밤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가 보다. 마치 달동네에 사는 어떤 이가 퇴근을 하거나 실연을 당했거나 해서 자신을 위로하면서 소주 한잔 기울이는 한 장면처럼, 술 대신 우동으로 내 허기진 배와 마음을 위로하던, 처량하기 그지없었던 그런 날의 밤이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토요일이 되면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저녁에나 돌아온다고 하였다. 공부를 하던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웠던 것보다, 생전 해 보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간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도 혼자서 다 큰 어른의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는 것에 한 숨이 나왔다. 아버지의 몸은 여위었는데도 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기만 했다.


말을 잃은 그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폭력 앞에서도 나에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던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미안한 얼굴을 나에게 보였다.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어떻게 해서든 움직여 보려는 노력을 하는 듯했다.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딸이 이렇게 하는 거 당연하잖아..."


한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평생 한이 많아 그 한을 나밖에는 풀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도 좋은 아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배웠고, 영화배우를 제의 받을 정도로 미남이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있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내가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대신 기저귀를 갈아주고, 엄마 대신 요양원을 알아보고, 또 목사님께 부탁해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준 게 전부였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외박하던 날도, 의사가 심장마사지를 하던 그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혼자였다. 이후에 그 순간에 함께 하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원망이 더해져 지금까지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나는 그 모든 것이 그의 아내였던 엄마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적어도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 뒤로 엄마는 철저히 숨어버렸다.


장례식 장에서 왜 그렇게 졸음이 쏟아졌는지 알 수가 없다. 장례식 장 바닥에서, 소파에서 기면증 환자처럼 자고 또 잤던 것 같다.


그 날 내가 외로울까 봐 교회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외롭지 않았었다. 자신들의 힘들었던 과거를 털어놓는 친구들도 있었고, 웃긴 이야기로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도 있었고, 새벽같이 달려와 발인을 도와주고 예배에 참석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늘 내 인생이 외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눈물도 나지 않던 그날 밤... 잘 익지도 않았던,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던 우동을 꾸역꾸역 삼켰던 보라매병원 앞 포장마차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날, 웃으며 그 우동을 먹었다. 웃어야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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