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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Nov 07. 2016

존재의 크기

내게 주어진 존재의 크기를 지켜나가고 싶다

누군가 바늘로 콕 찔러 나를 터뜨린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나는 다시 힘겹게 바람을 불어넣는다.

자신감 있는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온갖 '척'들을 있는 힘껏 불어넣고선 다시 '척'으로 살아간다.

또 누군가 이내 터뜨려 버리고 말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척은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언제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아니,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가 않다. 괜찮지가 않았다.


상처 난 마음의 페이지들도 달력처럼 찢어버릴 수만 있다면 딱 한 장 남은 달력을 뜯어버릴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아쉬움 한 톨 남김없이 그 소리 경쾌하게 찢어서 패데기쳐버릴 텐데...

바람이 몇 번이나 빠졌다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한 풍선이 어느덧 쭈글쭈글해져 이제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가 힘들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더 빨리 터져버린 것이었다.


"선생님의 기대와 다른 반응을 제가 보인다고 해서 그게 저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혹은 화를 내도 된다는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말에 상대는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가끔, 어떤 화의 근원 앞에서 너무나 이성적으로 되어버리는 나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상대는 이성을 잃고선 이 말 저 말을 해 댈 때, 내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굴면 상대는 말에서 자꾸 밀리기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더 화를 낼 때가 있다. 


"그래요, 선생님 참 똑부러지시네요..."


"그래, 너 잘 났다."


결국은 이런 반응으로 상대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만, 나는 결코 내가 이겼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있는대로 날뛰는 화는 내가 다 받아놓고선 화 한번 내지 않은 스스로가 한심해지기까지 하니 말이다.


사실, 나는 미처 날 뛰는 사람 앞에서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는다.

저 사람이 화를 내는 상황이 정당한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내 뇌는 그것을 분석하기 바쁘다.

감정이라는 화살을 이성이라는 방패로 막아내려고 하면서 그 상황이 끝나면 나의 머리는 뜨거워져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 되고, 내 감정은 깊은 바닷 속으로 침전되기 일쑤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내 발을 끌고선 같이 빠져 들어가자고 하는 것만 같다. 같이 들어가봐야 결과는 뻔한데 내가 왜 거기를 기어들어가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바닥에 가만히 얼굴을 대어 본다.
가슴과 몸 전체를 대어 본다.

온 우주가 그 위로 내려 앉는다.
불편할 것 같았던 바닥이 웬일인지 편안하다.

원래 내가 있었던 곳인 것 마냥...

난 참 작구나.
찢기고 피 흘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어설프기만 한 구도에 비뚤어져 버린 그림같기만 하다. 누가 여기에다 줄을 쳐 놓았으며, 알수 없는 공백을 만들어놓은 것인지 불완전한 구도로 가득찬 그림은 찢어버려야 하는 것인지... 다른 그림을 그려넣어도 그것이 도저히 완전해질 것 같지가 않다.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암호를 풀고 기울어진 구도를 바로 잡아 다시 나를 그려 넣는다면 그 그림은 다시 좀 볼만해질까... 

원래의 존재 그대로인 나를 누군가 애써 지워놓은 것 같은 느낌에 몇 날 며칠 졸음만 가득 쏟아지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으며, 급기야 몸살만 났다.

원래의 크기대로 나를 돌려놓을 수 있을까. 왜 내게 남아있는 자신감들을 누군가 자꾸만 찢어 없애려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마저 없다면 호흡할 단 한 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의미 없는 아가미만 둘쑥 날쑥 넘나드는 물고기와 진배 없는데 말이다.


종이에 다시 나를 그려나가고 있다.
이번에는 아주 크게, 최대한 섬세하게.

그래야 살아갈 수 있을테다...


알파고에게.

네가 빨리 내 삶에 들어왔으면 좋겠어.
네가 보편화된다면,
나 대신 욕 먹는 것, 나 대신 분노하는 것 그리고 나 대신 슬퍼하는 것 그런 것들만 시킬 거다.

하지만 넌 그 중 단 하나도 할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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