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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brella May 05. 2022

음식이 사랑의 수단이라면

김밥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이유

김밥을 처음으로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 소풍의 설렘 때문이었을 거다. 백일장이나 소풍을 간 날의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은 각자의 도시락통을 꺼냈다. 볶음밥, 유부초밥, 김밥 등 점심을 책임질 든든한 밥 종류와 방울토마토, 사과, 파인애플 등의 후식까지. 도시락의 모양과 내용은 저마다 다양했다. 누구의 것이 더 예쁜가, 누구의 것이 더 맛있어 보이나 나름의 심리전도 있었다. 서로의 도시락을 공개하는 점심시간은 미묘하게 경쟁심이 불붙던 긴장의 시간이기도 했다.


내 도시락은 엄마의 몫이었다. 그리고 엄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요리 솜씨는 그리 좋지 못했다. 엄마의 김밥은 늘 투박했고, 점심시간이 되면 그것마저 풀려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가 싸준 도시락이 창피했던 적은 없었다. 못난이 김밥이라도, 아무래도 좋았다.


“난 김밥 싸는 게 너무 싫어. 손이 너무 많이 가.”

엄마는 김밥을 이렇게 정의했다.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음식. 예쁜 모양으로 싸기도 힘든 음식. 사서 먹는 게 더 편한 음식. 그래서 엄마의 김밥이 더 좋았다. 더 소중했다. 그가 김밥을 만드는 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까. 알록달록한 동그라미엔 그의 수고와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소풍 전날은 엄마에겐 골치 아픈 날이었고, 내겐 설렘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 같았다. 소풍 당일은 더 행복했다. 새벽부터 각종 재료를 볶고, 밥에 참기름을 두르는 고소한 냄새에 이불에서 나오기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아유 귀찮아.”라고 하면서도 열심히 김밥을 마는 그가 좋았다. 김밥은 엄마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평소 별다른 스킨십이나 애정표현 없이 무뚝뚝한 모녀 사이였고, 그래서 그가 마는 김밥에 더욱더 의미를 부여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무 살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김밥을 싸는 게 귀찮다던 엄마는 이제 틈만 나면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이후, 끼니를 대충 때우는 딸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밥 한 끼 먹이기 위해서였다.


공부는 밥심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던 학창 시절, 엄마는 매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줬다. 수능이 끝난 날, 그는 이제 더 이상 아침밥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다. 나 역시 꼬박꼬박 먹던 아침밥 대신 10분 더 자는 게 행복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샌드위치.”

“또?”


스무 살이 된 이후, 우리 모녀 사이엔 이런 대화가 비일비재했다. 엄마는 여전히 내 삼시 세끼를 걱정했다. “밥은 먹었어?”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할까?” 엄마는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매일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자식의 끼니를 걱정하는 게 마치 엄마의 의무 같았다. 그는 내가 최소한 하루에 한 끼라도 밥이 들어간 음식을 먹길 원했다. 아침은 패스, 점심과 저녁은 늘 분식이나 샌드위치로 때우는 내 식사는 엄마에겐 익숙하고도 새로운 골칫거리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가 택한 방법은 김밥이었다. 그는 잠이 오지 않아 일찍 일어나는 날이면 망설이지 않고 김밥을 쌌다. 밥도 있고 계란도 있고. 게다가 각종 야채까지 들어가는 김밥은 엄마에겐 그야말로 슈퍼푸드였다. 처음엔 좋았다. ‘김밥=슈퍼푸드’라는 엄마의 공식을 어느 정도 동의하기도 했다.


김밥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돌봄이 노동’이라는 걸 인식한 뒤부터다. 이제는 예전만큼 엄마의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밥에 들어갈 재료 하나하나를 씻고, 또 볶고, 그것들을 김 위에 올려 마는 과정까지 들어가는 그의 수고가 마냥 달갑지 않았다. 어렸을 적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자기네 엄마가 만든 도시락이 최고라며 서로의 엄마를 자랑했다. 왜 모든 아이들의 도시락 준비는 늘 엄마의 몫이었을까?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아직도 김밥을 만드는 엄마가 불편했다. 엄마의 사랑이 불편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스물이 넘은, 다 큰 성인 딸의 끼니를 여전히 걱정하는 그 사랑의 당위성이 불편했다. ‘엄마니까’라는 말로 지워지는 엄마의 노고가 불편했다.


김밥은 세상이 엄마에게 씌우는 ‘좋은 엄마’의 잣대로부터 엄마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마는 수고로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느꼈을 거다. 그런 엄마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 다만 엄마를 그렇게 만든 세상이 밉다. 내가 어릴 적 엄마가 김밥을 싫어했던 이유에는 아이들이 서로의 김밥을 자랑하는 문화도 한몫했으리라 짐작한다. 세상은 음식을 잘하는 엄마를 더 좋게 보니까. 그런 엄마를 더 멋있게 보니까. 그는 좋은 엄마, 멋진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속상했을 거다.


물론 엄마의 음식에서 느끼는 사랑을 완전히 부정하긴 어렵다. 음식은 정성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사람들은 그 정성에서 사랑을, 그리고 행복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사람의 몸을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음식은 여전히 사랑의 수단으로 유효하다. 하지만 집밥으로 대변되는 가족의 사랑은, 특히 엄마의 사랑은 조금 옅어졌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의 끼니를 조금 덜 걱정하길 바란다. 나를 조금 덜 사랑해줘도 괜찮다. 그것이 엄마를 나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한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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