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90년대생의 생존 감각은 그들의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퇴근길에서 팀장님이 90년대생이 느끼는 생존의 위협은 뭐냐고 물었다. (질문의 계기는 지금 정리하기엔 귀찮으니 넘어가자.) 그 질문에 각자가 정의하는 '생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고 답했다. 옆에 있던 다른 팀원은 자신에게 생존은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이라고 말했다. 내가 일하고 삶을 영위하는 곳의 지속가능성이 자신에겐 생존이라고.
나는 아직 비즈니스적 마인드가 자라지 않아 그런지 처음엔 의아했다. 그에겐 생존이 그런 의미구나. 나랑 다르네. 그런데 곱씹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살아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불로소득이 없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노동은 필수니까. 내 노동의 지속은 결국 살아있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팀원의 대답을 들으며 내게 생존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예상치 못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게 생존은 독립이다. 원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 그들과의 거리감이 유지되는 삶.
전자파를 막기 위해 매일 밤 그가 공유기 앞에 세워두는 책배게 쿠션,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의 액정이 빛을 내고 있다 보면 켜지는 천장의 전등, 샤워를 할 때면 꼭 올려둬야 하는 화장실 슬리퍼. 그는 설교를, 나는 노래를 듣기 위해 매일매일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는 야간 현상. 나의 방이지만 그의 침실이고, 우리의 거실이지만 나의 침실이 되는 그런 비좁은 공간.
그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숨이 막힌다. 머리가 아득해지고, 생각이 많아진 탓에 잠을 자지 못한다. 이미 다 풀렸다고 생각한 응어리가 지긋하게 또다시 돌아오는 걸 보고 아-,를 읊조리게 된다. 깨달음의 아-, 탄식의 아-, 원망의 아-.
아-를 내뱉다 보면, 이렇게 한숨 쉬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누군가는 그가 그'녀'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되는 일상과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 그런 세상 틈에 내 아-를 듣고 있자면 내가 가증스럽다. 이런 두서없는 글을 쓰고도 '발행'을 누르면 뿌듯해할 나 자신이 가증스럽다. 하지만 난 그 버튼을 누를 테고, 며칠이 지나도록 읽어보면서 이 글의 공개 여부를 고민할 테다.
이렇게 주절거리다 다시 나는 살고 싶은가? 생존의 필요에 관해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대답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하자. 난 내가 살아있는 것도, 죽는 것도 불안한 사람이니. 그 답은 나만 아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