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해석노동"에서 벗어난다는 것.

by umbrella

20대 여성의 우울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하미나 작가의 기사를 보고 나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미나가 말하기를, "여자들은 만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가수 설리와 구하라 이야기를 꺼낸다"고 한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010


내게 우울이라는 단어는 너무 애틋해서, 나도 써보고 싶었다. 작가가 지적한 20~30대 여성의 우울의 기저에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이미 존재한 글을 보고 선택한 주제라 차별성을 어떻게 둬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사실 내 우울의 기저가 성차별의 역사와 관련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 우울은 무성적인 건 줄 알았다.


기획제안서를 쓰다보니 내 우울이 무성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됐다.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명제였다. 애초에 지금 세상은 이성애중심적, 남성중심적 사고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젠더정치로 가득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내가, 내 문제가 무성적이라는 생각이 말도 안되는 거였다.


그래서 썼다. 엄마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 나에게 상처줬던 엄마. 상처받았던 어린 나, 엄마의 돌봄을 당연시했던 나.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명확하게 가릴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가 원망해야할 건 서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들을. 여러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남성 독자의 시선과 피드백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어퍼컷을 날리고 싶었다. 한 친구는 개인의 이야기로는 설득력 있지만 전체의 이야기로 공감받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아무리 내가 어퍼컷을 날려도, 상대에게는 헛발질이겠구나. 해석노동에서 벗어나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내 해석노동 근성은 도무지 쉽게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도 다시 깨달은 지금, 더이상 그들의 의견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른 친구는 내 글이 기사로 나왔을 때 달릴 악플들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또다른 친구도 날 걱정했다. 나도 걱정됐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기사 발행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들은 다들 상황은 같지 않아도 공감이 갔다고 말했다. 누구는 개인의 이야기로 읽었고, 누구는 자신의 이야기로 읽었다. 그래서 일단 말하기로 했다.


더 잘 다듬고 다듬어서 나 스스로 떳떳한 글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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