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신중해짐

오래도록 불행한 나의 가족

by 엄서영

"저는요, 선생님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되면 안 되는 거죠. 마음이 이렇게 구겨져서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는데, 애들 앞에서 선생이랍시고 입을 떼는 건 좀 가소롭잖아요. 내가 뭘 가르쳐줄 수 있겠어요. 제 한 몸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는 병신인데."

상담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듯 오른 눈썹을 까닥 들어 올렸다. 눈빛은 봄볕처럼 포근한데, 수첩 위를 지나가는 만년필 소리는 서늘할 정도로 사각거렸다.

"그런가요? 서영 씨의 구겨진 마음으로는 선생님이 되면 안 된다?"

"네."

"서영 씨가 봐온 선생님들은 어땠는데요?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요?"

"다들 그냥 그랬어요. 고루하고, 지겨워 보였어요. 마지못해 출근해서 꾸역꾸역 버티다가 겨우 퇴근하는 것 같았죠. 실제야 어땠겠냐만 제 눈엔 그렇게 보였어요. 학교가 난방비를 아낀다고 히터를 잘 안 틀어줬거든요. 어느 날은 윤리 선생님이 성악설을 설명하다 말고 분필을 팍 던지더라고요. '씨팔, 손 시려서 못 해 먹겠네.' 묘하게 속이 시원해서 빵 터졌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은 혼자서 계속 씨팔, 씨팔... 가정 선생님은 수업하기 싫다고 맨날 재밌는 썰을 들려줬어요. 부부싸움썰, 클럽 처음 가본 썰, 어떻게 하면 놀아볼까 하는 게 애들이랑 비슷했죠."

"다들 그렇게 대충 사는데 왜 서영 씨는 못 해요? 선생님 돼서 꾸역꾸역 버티다가 월급 받으면 되잖아요.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고 놀러 다니고 그럼 안 되는 거예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질문은 날카로웠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눈빛에는 왜 그렇게까지 성실하게 절망하고 있느냐는 타박이 섞여 있었다.


"근데 저는, 그 지겨워 보이던 사람들이 좋았어요. 인사를 건네면 활짝 웃어주고, 교무실에 찾아가 시답잖은 걸 물어도 반겨주던 어른들이에요. '이놈이 내 쉬는 시간을 다 뺏네' 투덜거리면서도 '너만 먹어, 이 놈아.' 하면서 서랍에서 슬쩍 사탕 하나를 꺼내 줄 때. 그게 참 좋았어요. 제가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어른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다들 의욕 없고 지루해 보여도, 적어도 제게는 충분한 어른들이었어요. 나름 훌륭한 사람들이었던 거죠. 하지만 지금의 저는 달라요. 부서졌고, 무너졌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부모를 대신해 아이에게 온기를 건네줄 마지노선의 어른은 못 돼요."

선생님은 다시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대체 뭘 적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성실한 필기였다.


"회복되면요? 서영 씨 온도가 평생 차가울 리 없잖아요. 마음을 만져주고 달래서 다시 일어선다면요? 그때는 할 수 있겠어요? 서영 씨처럼 자란 아이들을 서영 씨는 귀신같이 알아볼 텐데. 원래 같은 온도끼리는 알아보는 법이거든요. 그때 꺼내주면 되잖아요. 서랍 속 사탕 하나."

"모르겠어요.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완전히 고장 난 것 같아요.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요. 어떨 땐 운석이 지구랑 충돌했으면 좋겠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다 같이 사라지게. 자살했다는 말 뒤에 따라붙을 수근거림들이 지독하게 쪽팔려요. 간절히 증발하고 싶어요. 언제 존재했냐는 듯 신기루처럼."

"그럼 좀 이따 죽죠? 급할 거 없잖아요."

선생님이 몸을 뒤로 툭 뉘며 다리를 꼬았다. 좀 더 발칙하고 거친 대화를 해보자는 신호 같았다.


"뭐 해보고 싶은 건 없었어요?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죽어도 안 늦을 텐데. 가고 싶던 곳이나 배우고 싶던 것, 만나고 싶은 사람. 그런 거 없어요? 나는 공유 팬미팅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겠던데."

머릿속이 멍해졌다. 하고 싶은 것? 요 며칠 나의 유일한 욕망은 나라는 존재를 파괴하고 삭제하는 것뿐이었다. 어려운 질문을 앞에 두고 타버린 재가 내려앉은 것처럼 막막했다.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생각 안 나요. 그냥 다 끝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니컬하던 목소리에 조금 더 깊은 농도가 실렸다.

"그럼 지금 말고, 아주 어릴 때로 가볼까요? 서영 씨가 아주 작은 꼬마였을 때. 환경이 안 돼서, 혹은 부모님이 안 해줘서 못 했던 거 있잖아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어릴 때. 그 말에 굳게 닫혔던 기억의 서랍이 덜컥 열렸다. 먼지 쌓인 풍경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촌 언니가 댄스 학원을 다녔어요. 대회 날 구경을 가면 언니 표정이 정말 낯설었거든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벅차 보였어요. 나도 배우고 싶어서 엄마 앞에서 일부러 몸을 흔들어 보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었죠. 자식이 셋인 가난한 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사촌 언니가 대회 나가는 날엔 일부러 아픈 척을 했어요. 정말로 아팠던 것 같기도 해요."

"댄스 학원 좋네. 나는 관절이 시려서 라인댄스밖에 못 하거든요. 또 있어요? 못 해본 거."

질문은 물꼬가 되어 연이은 기억을 퍼 올렸다.

"비행기요. 한 번도 못 타봤어요. 친구들이 여행 자랑을 하면 관심 없는 척 자존심을 세웠죠. '나는 여행 같은 거 안 좋아해.' 사실은 누구보다 가고 싶으면서. 비행기를 오래 타고 아주 더운 나라에 가서 끈나시 원피스 하나 입고 머리는 산발하고 돌아다니고 싶어요. 특히 겨울이 집 안까지 들이닥칠 때,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올 때면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훨훨 도망치고 싶다고."

"여행 좋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곳에 가겠어요. 벌써 부럽네. 뭐 좋아하는 연예인은 없어요? 실물 한 번은 봐야겠다 싶은 사람."

"음... 샤이니?"

상담 선생님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이 다 보이게 웃었다. 조금 머쓱해졌다.


"거 봐요, 있네. 비행기도 타고 춤도 추고 샤이니도 보러 가요. 그다음에 죽을지 말지 생각하는 건 어때요?"

"임용고시는 어떡하고요?"

"보려면 보고 말려면 말고. 죽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까짓 시험이 뭐라고요. 보름이나 남았으니 좀 더 고민해 봐요."

"보름밖에 안 남았어요."

"아니, 보름이나. 내일모레 다시 와요. 어떻게 할 건지 고민 좀 해보고."

"임용고시... 정말 안 봐도 되는 거예요?"

"서영 씨는 자기 인생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잖아요. 결정권은 서영 씨에게 있어요. 옆에서 떠드는 건 배경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미니홈피 BGM 같은 거죠. 분위기에 영향은 줄 수 있어도, BGM이 미니홈피에 올라간 사진과 글을 바꾸진 못해요. 말 그대로 배경음악."


남의 인생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시험을 안 볼 수도 있구나. 그런 선택지가 내게도 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역설적이게도 나는 더 망설였다. 그전까지의 고시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등 떠밀려 뛰던 질주였고, 실패하면 죽음으로 결판내면 그만인 타인의 숙제였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제부터 내 삶이 온전히 나의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슬그머니 뒷자리에 착석하고, 내 인생이라는 낯설고 묵직한 덩어리가 털썩 조수석에 앉아 버렸다. '임용고시를 안 보면 그다음엔 어쩌지? 차라리 보는 게 내게 이득 아닐까? 죽을 거라 생각했을 땐 떨어지면 끝이었는데, 살 거라고 생각하니 한 번에 붙는 게 효율적일 것 같기도 하고.'


죽기로 결심했을 때보다 훨씬 더 신중해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참 웃기게도 그랬다. 죽겠다던 사람이 어떻게 살지, 겁나 신중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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