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불행한 나의 가족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요?”
선생님의 질문은 무겁지 않게 상담실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이 상담실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딱 2년만, 2년만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싶어요.”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님이 저보고 자기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스물셋이 되도록 한 번도 제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해 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글자 속에 갇혀서 적으라는 대로 적고, 외우라는 것만 외우면서 살았어요. 딱 2년만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걷고, 하고 싶은 걸 하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찾아 나서고 싶어요.”
“구체적인 방법도 고민해 봤나요?”
선생님은 서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워킹홀리데이에 가볼까 해요. 거기서 고생도 해보고, 돈도 벌고 싶어요. 그냥... 여러 가지를 겪고 싶어요.”
“선생님이 된 후엔 할 수 없는 일일까요?”
그 말에 나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책상 모서리로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교대에 홧김에 온 건 맞아요. 그런데 실습을 나가보니 애들이 좋더라고요. 묘하게 아픈 마음을 숨긴 애들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부모가 제 역할을 못 할 때, 아이들이 만날 수 있는 다음 기회는 결국 선생뿐이라는 걸 담임 선생님들을 보며 느꼈거든요. 저 같은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마음, 분명히 있었어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싫어요. 한 번도 어른인 적 없었으면서 임용고시에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교탁에 선다는 게, 생각만 해도 역해요. 금방 무너질 것 같아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확고하네요. 그럼 그렇게 해야죠. 시험은 안 보는 걸로?”
그 지점에서 어제 저녁의 일을 떠올렸다. 순희에게 나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숨이 차오르는 만큼 기대도 차올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놓는 인생의 계획을, 엄마가 조금은 기특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순희를 몰랐다.
“이번에 시험 안 볼 거면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 내 딸 아니라고 생각할 거니까.”
임용고시를 안 본다고 절연하자는 말을 내뱉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좀 멍해졌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순희는 내 합격이 가져다줄 돈다발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순희는 쉬지 않고 나를 상처 내고 주저앉히기 위한 말들을 쏟아냈다. 방학마다 쉬는 교사가 얼마나 상팔자인지 아느냐는 말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순희는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늘 무지함을 공격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네까짓 게 뭘 아느냐는 비아냥, 자기가 만들어준 천국에서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다는 타박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를 주저앉힐 때마다 순희는 자신이 자라온 시궁창 같은 환경을 전시장처럼 펼쳐 보였다. 자신이 겪은 결핍과 수모에 비하면 내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은 과분한 호사이며, 그 호사는 오로지 순희의 희생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매번 강조했다. 순희에게 나의 성장은 곧 그녀가 쓴 매몰비용의 회수였고, 내가 그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배신이었다. 순희는 나를 자신의 딸이기 이전에, 돈 많이 들어간 조경수처럼 대했다. 평소라면 그 기세에 눌려 사과부터 했겠지만, 이상하게 어제는 그 목소리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엄마한테 가서 말했거든요. 2년만 다녀오겠다고. 그랬더니 임용고시 안 볼 거면 눈앞에 나타나지 말래요.”
“이정현의 ‘바꿔’ 같은 센세이셔널한 배경음악이 깔린 격이네요. 과격하고 파격적인.”
선생님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뒷맛이 썼다.
“주변 반응은 배경음악일 뿐이라는 말씀 덕분에 예전처럼 휘말리지는 않았어요. ‘아, 우리 엄마는 저러는구나.’ 생각했죠. 그런데요 선생님, 언덕을 내려오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 말대로 이게 정말 공부만 해본 애가 부리는 어린 치기면 어떡하나? 내가 정말 세상을 몰라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수습이 안되면, 아니면 수습이 존나 힘들면 어쩌나. 선생님이 지금의 저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으세요?”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담실 안에는 잠시 다정한 침묵이 감돌았다.
“음, 나라면? 좀 부담스러운 타이밍이네요. 참고만 해요. 서영 씨, 나 중학교 교사였어요. 적성에 맞아서 선택한 건 아니었고 서영 씨랑 비슷했어요. 어찌어찌 선생이 되었고, 가끔 보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지루했죠. 그러다 다르게 살고 싶어서 그만뒀어요. 그때 느꼈어요. 평생을 결정하는 선택 같은 건 없구나.”
선생님이 탁자를 손톱으로 탁탁, 리듬을 만들었다.
“인생은 지나치게 길어서, 다음 선택과 기회는 자꾸 열려요. 그래서 내가 서영 씨라면, 우선 시험장엔 갈 것 같아요. 내 인생의 1년을 쏟아부은 일이니 결과가 궁금하잖아요. 붙든 말든 일단 간다. 그 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한다. 합격해도 임용 서류 제출까지는 또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시험에 떨어지면 ‘머쓱하네?’ 하고 하려던 거 하면 되고요.”
“좋은 의견이에요. 감사해요.”
상담실을 나와 교정을 걸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질문들이 싱거워진 기분이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은 시험. 시험장에 간다. 시험을 친다. 붙거나 떨어진다. 붙어도 그만, 떨어져도 그만. 그토록 거대해 보이던 생의 절벽이 오후의 바람처럼 단순해 보였다.
어느새 헐렁해진 운동화 끈을 내려다봤다.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묶는데 늦가을 바람이 볼에 닿았다. 서늘한 듯 시원했다. 이 바람을 지나 내가 돌아갈 곳은 비좁은 태양고시원이었지만, 보도블록 위를 딛는 발동작이 어쩐지 사뿐사뿐했다. 내 인생의 배경음악이 뭐였는지 좀 알게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