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끊어내기로 했다
임용고시를 보러 갔고, 펜을 겨우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떠는 수험생을 구경했다. 붙거나 말거나 하는 마음으로 치러 간 시험은 생각보다 싱거웠고, 나는 합격을 예감했다. 지난 1년 동안 너무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내 머리는 시험 분야에선 성능이 좋은 편이었다.
배낭여행을 사랑하던 동기에게 멀고 더운데 싼 여행지 없냐고 물었다.
"멀면 유럽, 멀고 더우면 호주, 멀고 더운데 싸려면 스리랑카?"
"스리랑카?"
"치안도 나쁘지 않고, 바다와 산이 다 있어. 영어만 조금 하면 여행하기 어렵진 않아."
그렇게 나는 스리랑카로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나의 구조 신호를 받아줄 유일한 존재인 사촌 언니 유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부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밥을 사주던, 늘 나를 안쓰러워하고 대견해하던 삼성 다니는 멋진 언니다.
-언니, 나 시험 봤어. 붙을 것 같아. 그리고 2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스리랑카로 여행 가고 싶어.
-큰엄마가 허락하시겠어?
-허락받을 생각 없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
-계좌번호 보내. 조심히 다녀오고.
-고마워, 언니. 금방 갚으려고 노력할게.
유리는 내게 210만 원을 보냈다. 10만 원은 나를 향한 유리의 무해한 응원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배낭을 샀고, 스리랑카 바닷가에서 입을 원피스를 샀다. 인생 첫 비행기 티켓을 끊고 콜롬보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부모님은 나를 딱히 말리지 않았다. 말려봤자 꺾이지 않을, 약간 맛이 간 내 눈동자에서 일찌감치 항복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행기에 올랐고, 발밑으로 장난감처럼 작아지는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구름과 마주하며 높은 밤과 아침을 통과했다.
옆자리에는 머리를 산발한, 나잇대가 꽤 있어 보이는 여자, 유정이 앉아 있었다. 유정은 끈나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산발한 채 미친년처럼 거리를 휘젓고 싶다던 나의 공상을 형상화한 존재 같았다. 유정의 머리카락은 히피펌을 한 지 오래된 듯 푸석한 웨이브가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그건 정리되지 않은 머리가 아니라, 애초에 정리할 생각이 없는 머리였다. 제멋대로 뻗은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 주변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걸 보며, 나는 단정함이라는 강박 너머의 멋을 목격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갈 때 내가 복도로 비켜서며 눈인사를 나눴고, 대화는 그렇게 물꼬를 텄다.
"스리랑카로 여행 가요?"
"네."
"여행 많이 다녀본 솜씨네요. 혼자 가시고."
"아뇨, 여행은 처음이에요."
"그래요? 대단하네. 첫 여행지가 혼자 가는 스리랑카라니."
"여행 많이 다니셨어요?"
"네. 한국에선 숨이 잘 안 쉬어지거든요. 큰 숨을 참고 참다가 목구멍에서 꼴깍 넘어갈 것 같을 때, 그때마다 여행을 가는 편이에요. 서영 씨는 어쩌다 첫 여행을 스리랑카로 혼자서?"
유정은 눈동자가 유독 검고 깊었다. 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며 내 이야기를 기다릴 때, 홀리기라도 한 듯 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유정은 마흔 혹은 쉰 어디쯤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내가 말을 쏟아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문장에 끼어들거나, 섣부른 조언의 닻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특출 나게 깊고 검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담아낼 뿐이었다. 그 눈동자는 거대한 호수 같아서, 내가 던지는 날 선 말들도, 왜 스스로를 지워버리려 했었는지에 대한 고백도, 지저분한 사건들도 조용히 삼켜 안으로 가라앉혔다. 이야기는 툭 터진 제방처럼 흘러나왔고 나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궜다. 유정은 내 어깨를 천천히 토닥이며 말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 손길은 "힘내"라는 응원보다 "그랬구나"라는 수긍에 가까웠다.
"내 형제들은 다 제 처자식 챙기느라 바빠서, 부모님 부양은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해요. 아빠는 치매고 엄마는 다리가 불편하시죠. 두 분을 돌보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아요.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 생활이 영영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내 안에서 매일 싸워요. 그 모순 사이에서 목이 졸리다가, 여행지에 와서야 비로소 폐 끝까지 숨을 꽉 채워 넣는 거예요. 그러면 여행 끝 무렵엔 다시 한국에 갈 용기가 나요. '됐다, 이제 다시 잠수부처럼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겠다' 싶은 순간이 오거든요. 서영 씨도 이번 여행에서 당신만의 새 숨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유정의 깊은 눈동자가 나를 온전히 담아낼 때, 나는 연신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으며 끅끅 울었다. 평가받지 않고 그저 이해받고 싶었던 나의 허기가 비로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스리랑카 땅을 밟아야 여행이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내 첫 여행은 이미 깊은 밤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안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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