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끊어내기로 했다
누와라엘리야의 산꼭대기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출을 보겠다고 새벽 어스름을 등진 채 계단을 올랐다. 숨이 가쁘고 엉덩이가 아렸지만, 곧 마주할 일출에 가슴이 부풀었다.
곁에는 살면서 미국 본토를 처음 벗어나 본다며 젊을 때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L이 있었고,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여행길에 오른 H가 있었다. 우리는 잠깐의 친구가 되어 낯선 산의 새벽을 함께 걸었다. 하늘이 검은색에서 붉은색으로, 다시 연분홍과 연노랑으로 번져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이나 이어 붙이며 자주 웃었고 사이좋게 물을 나눠 마셨다.
그때 연락을 받았다. 임용고시 합격 소식이었다. 일출을 기다리며 잔뜩 들떠 있던 나는 흥분을 숨길 생각조차 못한 채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죄송한데 제가 지금 외국이라서요. 기한 내에 서류를 못 내면 어떻게 되나요? 귀국 비행기가 며칠 뒤라서요."
비굴하지만 한없이 해맑은 내 물음에 담당자는 흔쾌히 답했다.
"귀국하시는 대로 제출해주세요."
"감사합니닥!"
나는 낼 수 있는 가장 싱그럽고 귀여운 목소리로 답했다. L과 H에게 내가 드디어 티처가 되었다고 자랑하며 두 주먹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그들은 내가 '굿 티처'가 될 거라고 말해줬고, 나는 "Yes, I will!"이라고 대답했다. 누와라엘리야의 일출과 일출을 닮은 사람들이 나를 자꾸만 당차고 용감한 스물네 살로 만들었다. 산꼭대기에서 흘린 땀이 시원한 바람에 날려갈 때, 기어이 찬란한 새해가 떠오를 때, 나는 좋은 선생이 될 거라고 다짐했다. 그런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는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일기장에 다짐처럼 썼다. 보란 듯이 새 숨의 틈을 찾아내겠다고. 어떻게든 나를 지켜내겠다고. 나의 가족과 가난이 내 목을 조르고 숨을 빼앗아가려 해도, 나는 보란 듯이 숨 쉴 틈을 찾아내어 기필코 행복해지겠다고. 높은 밤을 가로지르는 내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적었다.
첫 발령지는 구도심의 오래된 학교였다. 멀리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주변엔 오래된 주택과 원룸이 빼곡한, 언덕만 없을 뿐 내 모교와 꼭 닮은 동네였다. 동네를 닮아 낡고 오래된 나의 첫 학교, 신규 교사가 발령 날 만큼 인기 없는 이 학교에서, 나는 애를 써서라도 좋은 선생이 되어주리라 마음먹었다. 스리랑카에서 가득 들이마신 새 숨으로 내 안에 용기와 사랑을 채워두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출근을 시작하고 첫 월급을 만져보기도 전에, 엄마 순희는 대출을 요구했다. 무능력한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으로는 세 자식 건사할 생활비가 벅차 빚을 졌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달라고 했다. 임용고시를 안 볼 거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던 순희의 모진 말이, 어쩌면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어설픈 모성애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순희는 모성애가 아니라, 곧 자기 몫이 될 줄 알았던 딸의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화가 났던 것뿐이었다. 돈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보다 그 진실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남편의 월급이 적어 생활비가 부족했다는 순희의 핑계는 거짓말이었다. 언니와 나는 진작에 독립했고, 거 둬 먹일 입은 막내아들 하나뿐이었다. 순희는 그저 자신에게 더 많은 돈을 쓰고 싶어 했다. 손가락과 손목에 반짝이는 것을 두르고, 이름난 브랜드의 옷을 걸치고, 아줌마들과 더 자주 어울려 놀러 다니고 싶어 했다. 순희의 외도, 잦은 외박과 사치. 나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덮어주었다. 순희의 거짓말을 보고도 속아주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순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순희를 훨씬 더 많이 사랑했으므로. 나는 늘 순희를 기다렸고, 순희가 딸 같아지고 내가 엄마 같아진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순희는 하루빨리 대출을 받으라며, 내가 수면 내시경을 받는 병원까지 쫓아오겠다고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병원에 동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순희였다. 목적은 병원 1층에 있는 농협이었다. 내시경이 끝나면 곧장 내려가서 대출을 받자고 했다.
나는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천만 원의 빚을 졌다. 그 정도면 순희가 평생 부르짖던 키워준 값을 치른 셈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부지런히 갚으면 금방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자위했다.
다만, 수면 마취에서 깨어나며 토해내듯 중얼거렸던 내 슬픔이 아린다.
"왜 가난한 집은 자꾸만 가난해. 왜 나는 교사가 되자마자 대출부터 받아야 해. 왜 엄마는, 아빠는, 그리고 나는 한 번도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는 거야. 왜 그런 거야. 나는 정말이지, 나는..."
마취에서 덜 깨 횡설수설하는 나를 내려다보면서도 순희의 얼굴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직 얼른 1층으로 내려가 천만 원을 받아내겠다는 생각뿐인 그 표정이, 내 마음을 한 번 더 닥닥 긁어 텅 비워버렸다.
스리랑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일기장에 빼곡히 적어 내려갔던 다짐이 떠올랐다. 보란 듯이 새 숨의 틈을 찾아내겠다던 결심. 어쩌면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틈이란, 내 인생에서 순희를 완벽하게 지워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