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끊어내기로 했다.
“서영 씨는 역설적이게도 불안할 때 편안한 거죠. 익숙하니까.”
독립을 하고, 몇 번의 시시한 연애가 지나가도 내 마음은 도통 평온해지질 않았다. 치열하게 구한 나의 독립 공간은 적어도 그때의 내겐 완벽했다. 웃풍도 없고 씻을 때 벌벌 떨 일도 없었다. 높고 깔끔한 섀시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할 때면 방 안으로 뽀송뽀송한 공기가 밀려왔다.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듣거나, 일기장을 책상 위에 턱 올려두고 외출할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내 공간에서 내가 안전하다는 감각.
떠나온 언덕 위, 오래된 나무집은 늘 축축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방문을 마음대로 닫을 수 없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는 방문을 닫는다는 이유로 욕설을 퍼부었다. "왜 문을 닫고 지랄이야. 시발!" 친구와 통화하다 그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을 때 느낀 수치심은 끔찍했다. 엄마는 내 일기장과 휴대폰을 수시로 열어봤고, 항의하는 내게 "엄마가 딸 것 좀 보는 게 어떠냐"며 당당했다. 엄마와 한집에 사는 건 수치심과 무력감의 연속이었다. 그 집에서 엄마는 통제자였고, 나는 늘 쪼그라들어 있었다.
이를 악물고 버틴 덕에 교사가 되었고, 대출금을 떠안은 상태였지만 매달 꽂히는 안정적인 월급으로 온전한 내 공간을 위한 월세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 평화의 유효기간은 짧았다.
동료 교사인 친구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파트 청약을 넣어보라고 알려준 것도 엄마, 계약금을 내준 것도 엄마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의 본가인 강남 아파트에 놀러 가 하룻밤 자고 온 날, 내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주말 아침, 그 집 부모님이 맞이하는 평온한 공기. 당연하게 차려지는 풍성한 아침밥을 투정 부리며 먹는 친구. 그 친구는 다달이 월세를 낼 필요도 없이 부모님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며 서울의 인프라를 당연하다는 듯 누리고 있었다. 속으로는 그 여유가 미치도록 부러운데, 정작 친구가 늘어놓는 배부른 고민 앞에서는 입이 다물어졌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그 말들이 허공을 맴돌 때, 나는 내 출발선이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으로 훌쩍 앞서가는 친구들 틈에서 나만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았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고작 원룸에 살며 여전히 엄마의 대출금을 갚고 있는 내 처지가 창피해, 매일 밤 쓰린 배를 움켜쥐고 새우잠을 잤다.
다시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면, 이번엔 우울과 불안이 반복되는 내 인생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참아온 감정들을 토해냈다. 친구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궁상맞다, 아등바등 살았는데 도착지가 겨우 여기냐,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방향도 잃은 채 횡설수설 억울함을 쏟아내는 내게 1시간 내내 듣고만 있던 상담가가 입을 열었다.
“서영 씨를 괴롭히던 엄마에게서도 벗어났고, 내내 창피하게 여겼던 언덕 위 집에서도 빠져나와 꽤 깔끔한 집에 살게 되었네요. 어릴 때보단 훨씬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월급이 나오는데도 여전히 불행한가 보네요. 어쩌면 지금이 서영 씨 인생에서 가장 평온할 수도 있을 때인데.”
“친구들은 다 저보다 잘 살아요. 기를 쓰고 살지 않았어도 다 저보다 여유롭고 평온해 보이고.”
“서영 씨 친구들이 다 서영 씨보다 못 살았으면 안 불안했을까요? 금세 또 다른 불안을 찾아낼 것 같지 않아요? 서영 씨는 역설적이게도 불안할 때 편안한 거죠. 익숙하니까.”
눈 뜨기가 불편할 정도로 퉁퉁 부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불안한 게 익숙하다는 말은 서늘한 저주 같으면서도 명중한 화살 같았다.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오며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평생 불행하게 살 운명인가?' 그리고 '그래,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에선 가장 호사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선'이라는 단서가 붙는 게 참 서글펐다. 남들과 비교하면 고작 이 원룸 하나가 전부지만, 바닥 밑의 바닥에서 시작한 내게는 이것이 내 몫의 훌륭한 호사가 맞았다. 지독하게 슬픈 운명이라도, 이 뽀송한 방과 일기장을 마음대로 펼쳐둘 수 있는 자유는 오롯이 내가 내 힘으로 일궈낸 것이니까.
마음만 바꿔 먹는다면 나도 평온해질 수 있을까.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오롯이 내 인생의 전진만 바라본다면 이 익숙한 불안을 끊어낼 수 있을까.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절실한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