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불행한 나의 가족
우리 집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차가 오를 수 있는 골목 사이, 차가 오르기엔 지나치게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길이었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면 집으로 기어 올라갈지 굴러 내려갈지 고민했다.
고모 말로는 아빠가 결혼할 때만 해도 그 집이 나름 인천에서 괜찮은 신축주택이었다고 한다. 고모는 집을 팔아 작은 원룸 건물이라도 해보라고 권했지만, 나의 엄마 순희는 관리하기 머리 아프다며 거절했다. 대출 없는 살림과 대기업 남편의 월급봉투면 인생에 아쉬울 게 없으리라 믿었을 테다.
순희는 결혼과 동시에 원가족 안에서는 누려보지 못한 사치를 시작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접고 공순이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보상 같았다. 순희의 텅 빈 가슴에 비싼 옷과 금붙이가 차올랐다. 그러나 우리 집 풍요의 유통기한은 짧았다.
IMF가 왔고, 아버지 재훈은 몇 달간 거실을 지켰다. 딸린 자식은 줄줄이인데 쌀통은 바닥을 보였다. 오랜만에 면접을 보러 간 재훈에게 면접관이 물었다.
“대기업 다니던 양반이 이런 일을 하겠어요?”
“자식이 셋입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 후로 재훈은 길 위에서, 혹은 타지의 낡은 모텔방에서 지친 몸을 뉘었다. 청춘을 다 바쳐도 월급봉투는 늘 얄팍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수십 년 동안 언덕 위 그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등학생 땐 친구들도 다 구불구불한 골목에 살아서 우리 집이 창피한 줄도 몰랐다. 우리는 장판을 뜯어 언덕길 썰매를 타고, 비가 오면 전봇대처럼 서서 장화에 물을 채우며 놀았다. 이따가 혼이 나더라도, 세상에 우리만 남겨진 것처럼 낄낄거렸다.
중학교에 가니 세상의 지도가 달라져 있었다.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학교에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듬성듬성 끼어든 이방인이었다. 딱 한 번, 시골길에 홀로 선 낡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집에 초대한 적이 있다. 이 정도면 내 가난과 비슷하지 않을까, 너랑 나랑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구를 맞이하기 전, 나는 집안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엄마 몰래 기름보일러 온도를 한껏 높이고 전기장판을 달궜다. 친구에게 방석도 깔아주고 이불도 덮어주었다. 하지만 낡은 창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웃풍은 내가 정성껏 마련한 온기를 비웃으며 교복 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네 집 왜 이렇게 추워?”
가난을 숨기려는 노력의 완패였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런 집에 초대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왜 이런 데 사냐?"
학원 차가 나를 내려주려고 굽이굽이 골목을 돌 때 들은 말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이런 집에 사는 것을 숨기기 위해 달렸다. 대로변에 내려달라고 말하곤 10분을 넘게 뛰었다. 당시 봉고차를 세워두고 지나가는 여성을 낚아챈다는 납치범 괴담이 돌았다. 나는 주차된 모든 차가 두려워 골목 중앙으로만 내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둠이 무서워 멈추지 못했다.
그 수치심은 성인이 되어서도 끈질기게 나를 따라붙었다. 대학 동기 부모님의 장례식을 다녀오던 새벽, 피곤에 절어 집 근처에 내리려던 나에게 동기 한 놈이 툭 내뱉었다.
“너 달동네 사냐?”
차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곱씹으며 차에서 내렸다. 나는 이 집에서 살고 싶었던 적이 없고 매일이 고통이었는데, 쟤네는 뭐가 재밌어서 웃는 걸까. 악착같이 공부해 겨우 너네 옆에 왔는데도 비웃음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한마디라도 쏘아붙이고 내렸으면 좋았을걸. 제대로 숨기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분위기 맞추려 지어버린 나의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씨발새끼.
나를 비웃은 그 애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모욕을 웃음으로 넘겨버린 비굴한 내게 던지고 싶은 욕지거리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새벽녘 어스름한 골목을 터덜터덜 걸었다. 고단했다.
추신. 달아주시는 댓글들 덕분에 혼자 쓰는 글이 아니라는 걸 느낍니다. 감사히 다 읽고 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