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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Jun 02. 2020

<캐롤>을 바라보기 위한 몇 개의 물체들

장갑, 모자, 때때로 기차

“당신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의 외모, 옷, 또는 멋진 차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


 토드 헤인즈에게 있어서 오스카 와일드는 빼놓을 수 없는 페르소나이다. 토드 헤인즈를 알린 대표작이자 동시에 글램 록에 대한 영원한 송가인 <벨벳 골드마인>의 주인공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오스카 와일드와 데이빗 보위를 절묘하게 리믹스한 흥미로운 결과물이었다.


 <캐롤>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보자. 서로에 대한 애착이 각자의 삶에 커다란 낙폭을 가져오지만, 사랑 앞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마주 서는 이야기의 끝을 보고있자니 개인적으로는 이게 정말 토드 헤인즈의 영화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초기 작품에서 날이 서있고 금방이라도 베어낼 것만 같던 냉소적 태도를 보였던 토드 헤인즈가 동화의 세계에서 낭만을 꿈꾸던 ‘오스카 와일드’적 사랑의 태도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는 신호는 아니었을까. 그야말로 낭만적 헌사로 가득한 동화인 최신작 <원더스트럭>을 보면 그런 생각은 더더욱 굳어진다.


 ‘오스카 와일드’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테레즈가 캐롤에게 빠져든 이유는 그의 외모, 옷, 멋진 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캐롤을 연기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외모와, 아카데미 의상상 수상자인 샌디 파웰이 디자인한 캐롤의 의상, 캐롤의 자동차인 패커드 ‘1949년형 슈퍼 8 디럭스’는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그것보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캐롤의 노래를 테레즈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낭만적인 설명에 가까울 것이다. 좋은 멜로드라마가 그러하듯, 테레즈에게만 들리는 이 노래가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도 들려야 함께 낭만적인 무드에 휩쓸려 들어갈 수 있다. 토드 헤인즈가 이 노래를 우리에게도 들려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꺼내어 놓은 것은 세심하게 배치된 오브제들이다.


장갑


 두 사람의 인연은 캐롤이 잃어버린 장갑을 테레즈가 찾아주면서부터 시작된다. 테레즈만이 들을 수 있는 캐롤의 노래에 테레즈가 답가를 부른 시점이다. 가청영역을 넘어선 그들의 노래를 우리가 은유적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영화가 처음 내어놓는 단서 중 하나가 바로 ‘장갑’이다.

 되짚어보면, 시간 순서상 가장 앞에 위치한 캐롤의 장면은 영화가 시작되고 약 10분여가 지나서이다. 영화는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른 캐롤을 테레즈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이때 캐롤은 장갑을 벗어서 어색하게 손에 들고 있다.



 캐롤은 기차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테레즈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시선의 교환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끼어든다. “아가씨, 화장실이 어디죠?” 이 대사가 잠깐 삽입된 후에 캐롤과 테레즈는 ‘덜컥’ 마주친다. 이 장면의 ‘순서’가 나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짤막한 시선의 교환 뒤의 방해, 그리고 비로소 이루어지는 캐롤과 테레즈의 첫 대화.


 한 눈에 운명을 알아본 눈빛을 그대로 이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시선이 먼저 스쳐 지나가고 난 다음 잠시 방해를 받았다가 다시 이어지는 이 만남의 형태는 마치 ‘라디오’를 연상시킨다. 라디오에서 주파수를 선국하는 톱니바퀴를 돌리면 올바른 주파수를 맞추기 전까지는 계속 노이즈만 들린다. 올바른 주파수로 향해갈수록 점점 식별할 수 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때부터는 세밀하게 톱니바퀴를 조절해야 한다. 노이즈를 지워가면서, 노이즈 없는 소리에 가 닿을 때까지. 캐롤과 테레즈는 자신들 앞에 끼어든 노이즈에 교란되지 않고 무사히 서로의 주파수에 안착한다. 그때 장갑이 마치 그곳이 제 위치인 듯 테레즈가 서 있는 쇼케이스 위에 떨어진다.



 캐롤과 테레즈가 세심하게 작업한 ‘톱니바퀴 돌리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이미 완료된 상태이다. 앞서 말했듯, 토드 헤인즈는 주파수 튜닝이 완료되었음을 장갑이 두 사람 사이에 털썩 떨어지는 장면을 통해 친절하게 보여준다. 토드 헤인즈가 사실은 ‘불친절한 작가’였음을 생각해본다면(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장편 극 영화 데뷔작 <포이즌>이나 한 인간을 파쇄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그린 <아임 낫 데어>를 떠올려보자) <캐롤>에서 캐롤이 장갑을 벗어 백화점 쇼케이스 위에 올려놓는 장면과, 캐롤이 떠난 다음 그가 두고 간 장갑을 테레즈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을 두 번의 시점숏에 걸쳐 보여주는 것은 신기하다는 인상까지 준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낸 구도 안에 포착된 오브제를 통해 진행될 것임을 알려주는 토드 헤인즈의 모습은 그야말로 낯설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적어도, <캐롤>에 있어서는 이 고전적인 전략이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캐롤>에 이어 <원더스트럭>까지 이어지는 고전 회귀적 태도에도 들어맞는 전략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모자


 테레즈가 캐롤의 장갑을 되찾아 주긴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캐롤의 적극적인 자력발전에 기인했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테레즈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런 면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캐롤>의 미덕은 한 인물의 주된 성격 너머에 담긴 이면을 추적하는 데에도 게으름이 없다는 데 있다. 넓은 범주 안에서 테레즈가 수동적인 인물일 수는 있어도, 영화에는 동시에 테레즈 역시 명확한 ‘주관’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는 장면도 세심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 유머가 깃들어 있다.

 

 백화점에 출근한 테레즈는 산타 모자를 지급받는다. 경비원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경영진의 선물”이라고 모자를 표현한다. 그리고 물론, 테레즈는 모자를 쓰지 않는다. 영화는 테레즈가 산타 모자를 쓴 사람들로 둘러싸인 직원용 식당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앉아있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다.


 식당 안에 산타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테레즈 혼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테레즈가 장난감 가게에 배치되고 매니저에게 모자를 쓰지 않았음을 지적당하는 제스처가 더 강하게 인식된다. ‘테레즈가 모자를 쓰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더 명확하게 인식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테레즈가 모자를 쓰던, 쓰지 않던 기능적으로는 달라질 것이 없는 설정이다. 앞서 이야기한 장갑이 두 사람의 관계에 직접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모자는 이 장면에서 효용이 없다. 그렇다면 매니저의 제스처는 잉여가 된다. 물론 잉여 자체가 영화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공백, 잉여가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캐롤>이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과 더불어 세심하게 오브제를 배치하는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보자. 모자를 단순히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캐롤>을 보는 재미의 절반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영화 속에서 테레즈는 자주 모자를 쓰고 있다. 즉 테레즈는 ‘모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경영진의 선물’이라면서 지급된 산타 모자는 거부한다. 매니저의 강권에 못 이겨 뒤집어쓰긴 하지만, 매니저의 제스처가 삽입되기 전까지 분명 테레즈는 산타 모자를 거부하고 있다.



 사실 이 ‘거부’의 제스처는 <캐롤> 전체에서 테레즈를 묘사할 때 생각보다 자주 보이는 요소 중 하나다. 그는 캐롤과의 대화에서 사실 자신은 캐롤의 딸과 비슷한 나이일 때 인형이 싫었고 기차세트를 가지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테레즈가 방문한 파티장에서 앞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그랬듯 테레즈의 주파수를 찾아 들어오는 타인의 행동을 부드럽게 무산시키기도 한다. 즉 테레즈는 강건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명확한 자신의 ‘주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 주관이 내리는 선택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는 매혹적인 존재인 캐롤에게서 출발했다 하여도, 테레즈의 선택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진척된다. ‘모자’는 테레즈의 ‘주관’이 그곳에 존재했음을 처음부터 알려주는 은근한 오브제로 번뜩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때때로 기차

 

 앞서 이야기했듯, 테레즈는 캐롤에게 기차세트 장난감을 추천한다.



 캐롤은 테레즈의 추천으로 구입한 기차세트를 직접 조작해보기도 한다. 이때 기차는 왼쪽으로, 그러니까 서쪽으로 움직여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금부터는 조금 과한 상상력임을 시인하고 전개하는 이야기임을 미리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별거 아닌 장난감 기차의 운행은 조금 재미있는 지점에 가서 닿는다. <캐롤>은 50년대 초반,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치던 뉴욕의 크리스마스 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캐롤과 테레즈는 함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뉴욕 맨해튼에서 시작해서 뉴욕 서부의 버팔로, 뉴욕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아이오와 주의 워털루까지. 그리고 여기서 다시 돌아온다. 기차가 움직이던 서쪽 방향과 동일하게 캐롤과 테레즈는 서쪽으로 움직이다가 어느 한 기점에서 다시 원래의 곳으로 돌아온다.



 캐롤이 테레즈에게 쓴 편지에 실려 있던 문구,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단순히 이렇게 끝인 걸까. 그저 ‘제자리로 돌아온’ 기차 장난감처럼, 이 여행은 캐롤과 테레즈에게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왕복 운동일 뿐인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테레즈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에 명확한 태도를 견지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한다. 캐롤은 하지와의 이혼조정에서 “자신을 부정하며 산다면 엄마자격이 없으”며, “우린 이렇게 추한 사람들이 아님”을 호소한다. 동성애가 정신적 질환으로 치부되던 시대에 캐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는 숨기지 않기로 결정한다.


 여행은 자신이 속해있던 익숙한 곳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 풍경들은 완전히 다른 감각들을 깨운다. 하지만 여행의 끝은 원래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커다란 파장이 발생한다. 물리적으로 그들의 여행은 아이오와 주 워털루에서 끝이 났을지라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이후에는 각자의 기반을 뒤바꾸기 시작한다. 여행을 떠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이후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토드 헤인즈의 대답은 아마도 ‘아니다’일 것이다. 그게 백화점의 기차 장난감과 우리를 가르는 가장 엄밀한 구분일 것이라 나는 믿는다.


※  이 글은 2018년 가을, 계간 영화잡지 <프리즘 오브> 를 위해 썼다. 출간된 글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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