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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15. 2020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지아장커 <산하고인>

 기술의 발전은 누구나 조그만 디카로 4K영상을 찍을 수 있게 만들었다. '누구나' 찍을 수 있기에 그 수많은 '누구'들의 관심사들이 4K라는 막강한 화질로 컨텐츠가 되어 되돌아온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4K의 보급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역은 유튜브 아이돌 '직캠'이다. 유튜브에 4K 라는 검색옵션만 설정해주면 팔도각지에서 촬영된 아이돌 그룹의 '직캠'영상이 튀어나온다. 그룹 전체를 조망한 앵글, 특정멤버에게 고정된 앵글, 기기묘묘하게 변하는 대형 속에서 센터에 서는 멤버를 따라다니는 앵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의 어떤 숭고한 노고를 생각하게 된다. 참고로 말해주겠다. 보급형 그래픽카드 정도만 컴퓨터에 장착하고 4K 60프레임 직캠 영상을 보면 그들이 내 눈 앞에 튀어나와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도대체 이 직캠은 왜 찍는 걸까? 팬질 하려고? 유튜브에 직캠을 전문적으로 올리는 '스튜디오'(그렇다. 말 그대로 취향의 공동체다)는 단순히 특정 그룹의 팬클럽이 아니다. 특정 팬덤이라면 본인들이 따라다니는  그룹의 영상만이 올라와야 하니까. 하지만, 그들이 올리는 영상들을 묶어내는 틀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다. 이걸 찍어내는 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어떻게든 박제하고자 하는 어떤 욕망에 다름 아니다. 


 왜냐고? 매순간은 과거가 되고 지금 내 눈을 통해 본 저들의 아름다운 몸짓은 눈을 깜박이는 순간 지나간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염없이 지나가버린 시간. 떠올리려 할수록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점점 그 자체로 혼자 변해가는 어떤 것. 우린 그것을 '과거'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과거’라는 단어는 어쩐지 모르게도 ‘쓸쓸하고 서글픈 정조’와 함께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지아장커에게 과거는 애수의 대상이었다. 혁명가극단으로 시작해 유랑극단으로 변해온 유장한 시간의 흐름을 그린 <플랫폼>은 그 확연한 예다. <플랫폼>의 촌스럽지만 에너지 넘쳤던 오프닝 공연장면에서 혁명가극단은 마오의 위대한 통치를 찬양하며 활기차게 노래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동지들은 흩어지고 어느새 트럭 위에서 모던 토킹의 고색창연한 고고장 음악 <Brother Louie>에 맞춰서 처연한 안무를 추는 소녀들만이 남는다. 그런가 하면, <스틸라이프>에서는 직접적으로 <영웅본색>을 끌어오기까지 하지 않던가. <영웅본색>이 알려주는 건 무엇이었나.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군’. 즉 강호의 도리가 아직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을 상징하는 <영웅본색>의 메인테마가 <스틸라이프>에서 울려 퍼지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한번은 그 애수를 보여주고 두 번째는 그 애수가 어떻게 돌무더기에 깔려버렸는지를 보여주지 않던가. 


 지아장커의 신작 <산하고인>에서의 ‘과거’는 1999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지아장커가 지금껏 견지해온 ‘과거’의 재현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형태를 끌고 들어온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지아장커는 ‘과거’의 시간을 더욱 더 ‘애수’의 시간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 ‘애수’의 시간을 더 극대화시키기 위해 지아장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실제로 90년대에 지아장커와 촬영감독 유릭와이가 직접 찍은 푸티지 필름(그러니까 직캠)을 직접 등장시키기 까지 하는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이상하리 만치 단호하게 과거가 완전히 끝나버렸음을 알린다. 그러니까, <산하고인>을 위해 아껴두었던, 그들의 어린 시절의 동네 풍경을 알 수 있는 진귀한 자료들까지 선보이면서 동시에 자기들이 찍은 이 ‘직캠’의 시간(과거의 시간)은 이미 온전하게 끝나버렸다고 선언해버린다. 지아장커가 ‘미래’를 직접 다루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보는 이들에게 계속 끊임없이 ‘시간’과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건 ‘미래’ 역시도 ‘시간’이라는 재료를 통해서 획득되는 어떤 물질이라는 점이다. 지아장커의 영화들에서 지아장커는 ‘현재’의 어느 시점에 이야기를 종료했다. 과거로부터 출발했다 해도, 지아장커는 지금 이 순간 땅 위에 발붙이고 서있는 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으로써 다가올 미래가 어떨지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플랫폼>, <세계>, <천주정>)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서려있는 어떤 희망(<스틸 라이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산하고인>에서 지아장커는 직접 미래로 날아가 버린다. 이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아장커는 마치 ‘날아가 버린 것처럼’ 벼락같이 미래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순간 지아장커는 더 이상 사라져가는 것을 붙잡는 노력이 무의미해졌음을 알린다. 그러니까 과거의 시간을 끌어내어 애수 띤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의 시간이 애수를 앗아가 버리지 않게 싸우던 지아장커의 싸움은 완전히 ‘현재’가 끝장나버린 미래로 확장된다. 


 지아장커는 단순히 <플랫폼>에서 혁명가극단이 유랑극단으로 변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수준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과거의 따스함을 더 이상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시간으로까지 이야기를 끌어간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현재’가 끝장나버린 미래의 시간이라면 다시 말해 ‘현재’가 ‘과거’가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지아장커는 직접 미래로 넘어가 현재라는 과거를 필사적으로 추억해보려 한다. 이 순간 <산하고인>은 지아장커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하며 어떻게든 시간 속에서 버텨보려는 이들을 감싸 안으며 동시에 미래가 되어도 여전히 현재라는 과거를 끌어안고 싸움을 지속하겠다는 선전포고가 된다. 


 이 선전포고는 그의 부인이자 페르소나인 자오타오의 몸짓을 통해 형상화 된다. 순수했던 시절의 춤을 다시 재현하는 자오타오의 춤은 지아장커의 싸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아마도, <스틸 라이프> 이후의 지아장커의 영화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라스트 일 것으로 확신한다. 자오타오는 행복했던 옛 시절을 생각하며,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춤을 춘다. 오프닝에서 지아장커는 이들의 춤을 매우 정성들여 찍었다. 그리고 엔딩에 이르러, 2025년의 자오타오는 1999년의 자신을 생각하며 춤을 춘다. 이 춤에 서려있는 에너지는 나의 모자란 표현으로는 미처 그 표면을 묘사하는 것조차 버겁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한다. <산하고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오타오의 춤은 애석하게도 무의미하고 헛되다. 그(그녀)가 붙잡으려 춤을 추고 있는 이 순간마저 흘러가 잊히게 될 터이다. 


 하지만, 비록 무의미하다 해도 지아장커는 춤을 멈추지 않는다. 그 춤을 통해 지아장커는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과거를 다시 떠올려보려 한다. 분명 실패할 것이 분명한 싸움을. 시간이라는 적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없이 포기할 수 없는 싸움도 있는 법이다. 그 싸움 앞에 선 나약한 인간에게서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그 '숭고함'이야 말로 영화의 본령은 아닐까. 오늘 찍은 구름은 내일의 구름과 다르다. 오늘의 구름은 사라졌다. 이미 지나가 버린 그 구름을 영화를 빌어 다시 보고자 하는 이의 애달픈 마음은 헛되므로 애틋하다. 지아장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과거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놓고도 자신이 패배할 것이 분명한 싸움을 세팅해놓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시간과 싸우는 자신과 함께 해주기를 간절히 요청한다. 펫숍 보이즈의 응원가(<Go West>)와 함께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끌어가야만 하는 이 가련한 싸움은 영화가 도달하고자 했던 어떤 목표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영화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내기 위한 처연한 과정에 다름 아니다.


※ 글의 제목은 김탁환의 동명 소설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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