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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16. 2020

악행의 자서전

컴 헤는 밤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컴퓨터가 사망하다니. 나를 두고 어찌 이리 가버릴 수 있단 말이오 컴공! 아직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이리도 많거늘! 

    

 컴퓨터가 죽어버리니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새삼스럽게도. 나의 삶은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컴퓨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나를 위해 존재해주었다는 깨달음이 덜컥 찾아왔다. 다행히도 공유기는 아직 죽지 않아 나는 핸드폰으로 동네의 컴퓨터 가게를 부지런히 수소문 했다. 이내 찾아온 기사님께서 책상 아래에 있던 컴퓨터 본체를 열어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봤다.     


본체 안에 기름이 왜 이렇게 많죠이건 누가 본체를 열고 뿌린 거 에요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튈 수가 없어요어떤 이유인진 모르겠는데 누가 일부러 뿌린 거 에요     

 

 순간 등 뒤에 소름이 한 줄기 솟았다. 누가,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일부러, 아무것도 안 건드리고, 컴퓨터만, 케이스를, 열어서, 부품엔, 손을 대지 않고, 기름만, 뿌렸다!      

 

 이거야 웬. <기묘한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시츄에이션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범인은 나라는 사람의 행동패턴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게 분명하다.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인간. 내게서 컴퓨터를 뺏어간다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매우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즉시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머릿속에 얼굴들이 하나하나 스쳐지나갔다.     

 

 그래, 네가 단편 찍는데 도와달라 했을 때 그냥 귀찮아서 일 있다고 한 적 있었지. 어쩌면, 네가 잘 나갈 때 겉으로는 축하하는 척 했지만 너 없는 자리에서 나랑 다른 사람들은 네 험담 했던 것 때문에? 혹시, 네 할머니 장례식에 못 갔던 앙심으로? 아니라면, 네가 등단했을 때 배아파 시상식 안 간 것 때문에?     

 

 여기까지 떠올리고 보니 나 라는 사람이 얼마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는지가 실감이 났다. 새삼,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못 되어 처먹은 인간인가.     

 

 컴퓨터를 고치고, 우울한 마음에 마트에 나가 소주와 삼겹살을 사왔다. 이렇게 못 되어처먹은 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주위에 머물러준 친구와 함께 원룸 방 가운데에 신문을 깔고 브루스타에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웠다. 소주 특유의 들척지근한 감미료 맛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쓰디쓰기만 했다. 그렇게 내 악행의 자서전을 쓴 날, 나는 내 인생이 얼마나 비루한가를 떠올렸다. 내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찢겨나갔고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불판 위의 삼겹살 기름도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말이지. 원룸 방 한 가운데 앉아 삼겹살을 먹다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간 기름들은 어디로 들어간걸까?


사진출처: https://mygaming.co.za/news/hardware/105803-this-is-what-happens-when-building-a-gaming-pc-goes-terribly-wro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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