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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17. 2020

적대적 공생

자원봉사와 스펙사이

 단어는 제각기 그 자신이 가진 고유한 소명이 있다. 단어는 자신을 이용해 이 세상을 해석해준다. 단어는 한 명의 고유한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단어는 그 해석의 틀거리가 되어준다. 그런데, 이 단어가 원래 그 자신이 가진 고유한 의미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오용되고 그것이 통용되는 순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옥이 된다.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가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혹시 영화제에 가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제가 열리는 장소의 지리에 익숙한 사람, 처음 오는 사람, 여러번 와도 처음오는 것 같은 사람, 영화는 집어치우고 술 마시러 온 사람, 연예인 보러 온 사람, 집이 여기인 사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화 5편보는 사람, 전날 친구들과 술 먹다가 아침 영화 제낀 사람, 영화제에 초청된 사람 등등등 영화제 기간에 해당지역은 거의 아수라장이 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스케줄을 가지고 움직이고 그 스케줄이 어긋나면 그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스케줄을 지킬 수 있도록 영화제는 노란 점퍼 파란 점퍼 빨간 점퍼 하얀 점퍼 초록 점퍼를 입힌 친구들을 꼭두새벽부터 길거리로 내몬다. 영화제 자원봉사자들. 흔히 ‘자봉’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영화제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갑질하는 동네다.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기관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방문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봉사를 나누고 돌아가면 마음 속 깊이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영화제 자원봉사자들은 ‘면접’을 본다. 나는 잘못 말하지 않았다. ‘면접’을 본다. 돈도 안 받고 단지 영화가 좋아서, 분위기가 좋아서, 영화제라는 축제의 일원이 되어 함께 해보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의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보고 ‘탈락’을 시킨다. 자원봉사자들이 하는 업무가 단순히 길거리에서 교통정리 하고 상영관 위치 알려주고 표 받는 일 뿐만이 아니다. 물론 이 정도 업무도 매우 과도하긴 하지만. 모 영화제 같은 경우는 영화제에 방문하는 각국 감독들의 에스코트부터 숙소예약 스케줄 관리 까지 자원봉사자들이 도맡는다. 그러니 이 자원봉사자들한테 ‘숙련된 외국어 회화능력’ 까지 당당하게 요구한다. 뭔가, 한참 잘못 된 것 아닌가? 자원봉사를 면접 보고 한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는지?     

 

 친구들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 그대로의 순수하고 온전한 열정을 가지고 영화제 자원봉사자를 신청한다. 그리고 영화제들은 친구들의 그 순수한 열정을 그저 ‘경험’으로 ‘이용해’ 먹는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 아닌가? ‘열정’을 이용해먹는 자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있는 그런 포식자들이 우리를 착취할 때 활용되는 미사여구가 ‘열정’ 아니던가? 모 영화제 운영팀장이 기고한 글을 보면, 온갖 종류의 실전업무를 체험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은 영화제 자원봉사자의 '매력'이며. 기업체에서 자원봉사 이력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스펙'을 쌓으러 오는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이 압도한다고 적어놨다. 이 정도까지 단어가 혼탁해지면, 오히려 문제는 심플해진다. 영화에 매력을 느낀 순수한 이들의 마음, 그리고 스펙을 쌓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엄혹한 시간이 결합되면서 영화제는 자기들이 '인력'을 '뽑아서' '부릴 수' 있는 꽃놀이패를 쥐었다. 그러니 이 상황을 개선할 노력도, 의지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자원봉사자들의 수기를 읽어보아도 마찬가지다. '돈'을 받았으면 이건 '일'이었을 거다.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는 내용의. 도대체. 이들을 둘러싼 시스템은 어떻게 해서 '일'은 나쁜 것이고 '일이 아닌 것'은 좋은 것이라고 시스템에 참여한 주체들의 개념을 뒤틀 수 있었는지 아연할 뿐이다.  


 ‘열정’이라는 본래 단어의 의미를 되살리자, 같은 공자님 말씀엔 미안하지만 관심 없다.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안간힘을 짜내는 친구들은 이미 자기가 발휘해야 할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들을 때마다 짜증나니 그냥 ‘열정’ 요구하면 벌금 내게 하자. 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단어도 있다. 경험. 좋은 경험인지 나쁜 경험인진 내가 판단할게. 당신들한테 좋은 경험이 아니라, ‘나’한테 좋은 경험인지 아닌지를.


사진출처: 2016년 5월 1일.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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