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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18. 2020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서영희의 얼굴로 기억될 세 번의 죽음에 대하여

※몇 편의 영화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억해 모두다 오늘 하루만은 광대의 춤사위를 세상에 어떠한 서러운 죽음도 그냥 잊히진 않네”

             

         패닉,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中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죽음     


 <추격자>에서 서영희는 보도방에 근무하는 안마사 김미진을 연기한다. 김미진은 자신이 건사해야할 딸을 위해 그 자신의 육체를 거래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김미진의 육체를 매물로 내놓고 이득을 취하는 보도방 사장 엄중호(김윤석)가 있다. 성적으로 불구인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은 그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를 손쉽게 해소하기 위해 ‘성’을 파는 여자들을 불러 살해하고 김미진은 지영민에 의해 살해된다.


 이 짧은 요약만으로도, 김미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진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죽음에서부터 도피하려는 김미진의 행동들은 무의미하고 덧없다. 김미진은 그 자신이 키우는 딸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인간’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채워줄 도구이거나 그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워줄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봉준호의 <괴물>에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자 그 곳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현서(고아성)가 잡혀가는 것처럼, 이상성욕을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범이 등장한다면 가장 먼저 살해당할 사람들은 성을 파는 사람들이다. 서영희는 완벽히 설정되어 있는 ‘비극 기계’속에 빠진 인물을 그린다. ‘스릴러’라는 가장 관습적이고 양식적인 장르의 영화에서 피해자 역을 맡은 배우가 표현해 낼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서영희는 그 자신을 욕망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인간들로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려다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한 인간의 표정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장철수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은 <추격자>가 보여준 ‘비극 기계’의 사이즈를 더 확장시킨 형태로 볼 수 있다. ‘작은 사회’ 로 볼 수 있는 시골마을의 유일한 젊은 여자인 김복남을 연기한 서영희는 한국 사회가 ‘가족’이라 부르는 모두에게 착취당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마을의 남자들 중 김복남을 강간하지 않은 남자가 없다. 그래서 김복남이 가진 아이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김복남과 김복남의 아이는 그들이 속해있는 커뮤니티의 죄악을 상징하는 살아있는 생물체가 되어버린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연상시키는 장면, 김복남은 태양을 응시한 후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자신을 착취했던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킨다. 그 복수가 향한 마지막 방향은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외면했던 친구 해원(지성원)이다. 두 여자의 기묘한 격투 끝에 김복남은 해원의 손에 살해당한다. 그때, 이 영화를 단순히 슬래셔 무비로 끝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건 서영희의 얼굴에 새겨진 어떤 아련함이다. 해원의 무릎을 베고 서글프게 죽어가는 김복남은 서영희의 몸과 얼굴을 통해 그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남길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세 번째의 죽음     

 

 그리고 이제, <마돈나>. 여성 수난 영화에 서영희가 등장하면 당연히 서영희가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마돈나>에서 서영희는 희생자가 아니라 화자로 등장한다. ‘마돈나’라는 별명을 가진 한 여자가 겪는 비극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서영희는 무연고자로 심장이 적출되어 사망할 위기에 빠진 마돈나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록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영희가 그 자신이 이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보다 더 나은 상황에 놓인 인물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옆방의 소리가 전혀 방음되지 않는 집에서 연체료 고지서를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며 등장하는 문혜림(서영희)은 병원 VIP병실의 간호조무사다. ‘간호사’가 아닌 ‘간호조무사’인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업무 밀어내기를 당하고 VIP 병실에 ‘투숙’ 하고 있는 장관(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있어야 하나 신부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있다)과 아버지의 목숨을 붙여놓기 위해(아버지가 죽으면 막대한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된다) 위법을 저지르는 아들(극중에선 ‘사장’이라고 지칭한다)을 본다. 이 사장은 아버지에게 심장을 구해주기 위해 무연고자인 장미나(권소현)를 병원 VIP 병실에 입원시킨 뒤 장미나(이 여자가 바로 마돈나다)의 심장을 적출해 아버지에게 이식하려 한다. 장미나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지만 이 사장은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문혜림은 이 장미나 에게 가족이 있는 지를 확인해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장미나의 과거를 조사한다. 


 

  서영희는 이 영화에서 관찰자 문혜림 으로 등장한다. 장미나의 기구한 삶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표정이 생기고, 마지막 순간엔 장미나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긴 하지만, 그 자신조차 장미나(그러니까 마돈나)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관찰자다. <추격자>와 <김복남>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심리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그렸던 서영희는 이 영화에서 거의 표정을 짓지 않는다. 후반부 이후, 그러니까 장미나의 삶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표정이 생기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서영희는 거의 시종일관 무표정하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다. 서영희의 표정에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어떤 ‘거리감’이 있다. 아무리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고 그의 말을 들으려 노력해도 해갈되지 않는 어떤 거리감. 이해하지 못함. 순간순간 타인의 삶이(이 영화에서라면 타인의 ‘기구함’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어떻게 해도 그의 삶 안으로 합치되지는 않는 한계가. 피해자가 아닌 관찰자로서의 한계를 서영희는 그 자신의 표정으로 버텨낸다. 

 

 하지만, 그 안쓰러운 버텨냄이 화면 밖의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 오롯이 서영희의 표정이 우리에게 주는 서글픈 숙제와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추격자>에서 김미진은 죽었지만 그 딸은 엄중호와 유사가족이 되고 <김복남>에서 해원은 복남의 죽음 이후 자신을 둘러싼 불의의 세계와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마돈나>에서 문혜림은 장미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된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비록 그 죽음을 막을 순 없어도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는 한, 우리는 버텨낼 수 있으리라.


※ 이 글은 2015년 가을, 한국예술종합학교 매거진 <K-ARTS>를 위해 썼다. 글의 제목은 무한궤도의 데뷔앨범 수록곡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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