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의지에 대해
요즘 사과 과수원 열간은 초생재배로 풀이 있고 나무 하부에는 풀이 없이 키운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그리고 유럽 등지에서 보편화되어있다. 사과나무 하부에 자라는 풀들이 영양분 섭취에 있어서 나무와 경합관계에 있다고 여기어 제초제인 바스타를 이용하여 수관하부를 깨끗이 한다. 바스타는 일전에 유럽 NGO에서 맥주에 들어있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제초제 성분 글리포세이트와 사촌지간으로 글리포시네이츠 암모니움이 주성분이다. 현재 미국에서 점증하는 글리포세이트에 대한 반감과 우려로 글리포시네이트 암모니움을 이용한 GMO농업을 시험 중이라 한다. (2019.05 글리포세이트 맥주, 슬픈 코미디 참조 요망) 내가 막 농사를 시작할 때는 봄에 수관하부에 한번 뿌리면 7월까지 거의 풀이 안나며 나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약제가 있었는데 2-3년 뒤에 부작용이 있다면서 사용 금지되었다. 현재는 바이엘에서 나온 "알리온"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MSG 혹은 사카린은 한때는 암의 근원이 되었다가 또 지금은 암과는 관계없는 물질이라고 분류되는 것처럼 농약도 시간이 가며 사용 가능했던 약제가 금지품목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어찌 보면 건강을 위한 노력이 일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반증이 되니 고무적인 일이긴 하다. 어쨌든 현재로는 제초제는 나무와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제초제가 토양미생물에 잠시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좋은 토양이란 것이 작물생육에 알맞다고 하는 토양입자 (고상) 약 50%, 토양공극의 물(액상) 30-35%, 공기(기상) 20-15% 라고 한다. 그 토양 안에는 적당한 유기물과 NPK로 대표되는 비료성분이 적절히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고 교육받은 내용이다. 그러나 식물이 광합성한 당분을 뿌리를 통하여 땅속으로 배출하여 땅속 미생물과 공생관계를 기본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확신을 주었다. 되도록 다양한 미생물이 많은 토양이 좋은 토양이고 제초제는 그런 환경을 만드는데 도울 일이 적다는 생각이다.
틈/여유가 있어 느슨한 관계가 더 효율적이다.
문제는 제초제를 안 쓸 경우 예초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모든 수관하부를 등에 메는 예초기로 베는 것은 엄청 일이 많고 피곤한 작업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95% 차광 성능이 있다는 차광막을 수관하부에 까는 방법을 택했다. 약 60센티미터의 폭으로 나무 양쪽에 깔아 놓았다가 수확 후 나무를 가운데 두고 감싸서 봄철에 동해를 예방하는 흰 페인트칠을 대신한다. 지온이 20도 정도가 되는 5월 말/6월 초에 다시 나무 양쪽으로 깐다. 이처럼 차광막을 깔아서 풀을 줄이는 방법이 토양의 미생물에도 영향을 덜 준다고 생각한다. 차광막이 있다 해서 예초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차광막 주위와 막을 뚫고 올라오는 풀들을 처리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몇 개월 사이에 차광막 틈 사이로 올라온 풀들이 차광막을 땅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차광막을 뚫고 올라오는 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차광막을 까는 데 2가지 방법을 적용하였다.
첫 번째 방법은 올해 6년 차 되는 밭에는 나무 양쪽의 차광막을 1m 간격의 나무 사이를 세 군데 정도 연결하여 차광막 자체는 땅에서 약간 띄워진 상태로 펼쳐지게 되었고 두 번째는 2년 차 밭에 적용한 것으로 양쪽의 차광막을 1-2cm 겹치게 하여 "ㄷ" 철사로 땅에 고정하였다. 이는 첫 번째 방법에서 나타난 문제점인 양쪽 벌어진 차광막 사이로 올라오는 풀들을 차단하기 위한 시도였다. 2년 동안 양쪽을 비교한 결과 땅에 고정시킨 후자의 경우 1-2cm 겹쳐진 부분에는 풀이 올라오는 경우는 줄었으되 겹쳐지지 않은 많은 부분에서 고정된 틈으로 빛을 받아 올라오는 풀들이 더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무 타이트한 것보다는 여유가 있는 관계 혹은 여유를 주는 관리가 훨씬 효율적이다. 이는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야 라고 풀들이 알려줬다.
개천에서 용 나기- 민들레와 쑥
올해 6월 초에 차광막을 깔기 위해 제초작업 중에 만난 민들레와 쑥이 눈길을 끌었다. 차광막 바깥에서 충분한 빛을 받는 민들레와 쑥은 빛이 잘 안 드는 차광막 사이에서 자란 민들레와 쑥보다 키가 훨씬 작다. 차광막을 벗어나 꽃을 피우기 위해 꽃대의 길이가 앞쪽에 있는 민들레의 거의 2배만큼 자랐다, 훨씬 가혹한 환경 안에서.
쑥 또한 앞쪽에 있는 좋은 환경의 친구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건실한 쭉쭉빵빵이다. 심지어 좋은 환경의 친구들은 줄기의 직경이 작아서 비실거리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위 사진을 찍기 위해 쑥을 뽑아 정리하면서 놀랐다. 크고 잘 자란 쑥이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을 텐데 현실은 정 반대다. 빛을 보고 꽃을 피워 꽃씨를 날리기 위해서 기를 쓰고 자란 결과다.
차광막 안에서 자라는 민들레와 쑥은 어떻게 그런 자람세를 유지하게 되었을까? 살려면 빛을 가리는 차광막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고 또 그렇게 자라도록 영양분이 배분되었을까? 식물에게 그런 판단을 하고 실행할 수 있는 뇌 혹은 CPU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여러 책을 통하여 식물이 일정한 기억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았지만 특정 부분을 지칭한 것은 보지 못했다. KAOS 세미나에서 어느 교수님이 식물의 뿌리를 뇌에 비견하는 것은 본 적이 있으되 그도 확신이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막 읽기를 끝낸 "마이크로 코스모스,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의 영향으로 식물 안에도 동물처럼 많은 종류의 미생물들이 있을 것이고 식물 안에 있는 미생물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성장의 방향이 결정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던 차광막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남 보다 더 열심히 노력(?) 한 결과 현저한 차이를 만들어 내며 꽃을 피운 민들레와 잘 자란 쑥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들의 노력의 결과는 "개천에서 용 되기"에 비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당연히 모두 다 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차광막 안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들이 차광막 위로 얼굴을 내미는 날을 위해 기어 다니는 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