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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Oct 07. 2018

농부는 만능선수다(1).

 농부는 기계공이다.

유능한 농부는 만능선수여야 한다.

사과농부 5년 차인 지금도 농부가 된다는 것은 한국 안의 호주로 이민 온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다른 문화에서 정착을 해야 되고 하나에서 열까지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돈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봉화가 시드니다.

가끔  호주 친구 밥 카울리를 생각한다.

그가 자기 집구경을 시켜주면서 3년째 하고 있는 페인트 칠하기가 올해 끝난다고 말하며 즐거워하고

각종 공구 및 기자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작업창고를 보여 주던 광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무언가가 고장이 나면 간단하게 해결했다, 

"관리실에 연락해봐" 혹은 "사람을 불러". 

봉화에서는 일단 제일 가까운 곳이 15킬로미터, 좀 더 큰 곳으로 가려면 25킬로가 떨어져 있어서

출장비가 다르고 가격도 다르다. 돈도 돈이지만 필요한 때에 올 수 있는지도 문제다.

결국은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봉화나 시드니나 내가 하지 않으면 돈이 너무 든다.


그러다 보니 일단 귀농을 하면 필요한 것은 많은데 있는 것이 별로 없기에 제일 많이 방문하게 되는 

곳이  철물점이다.

" 아, 귀농하셨어요? 한 6개월간 저를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지금은 친해진 H 철물 이사장이 내게 

한 말이다.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자주 만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영천의 H선생 과수원에 실습할 때 제초기를 운전하다가 배수관을 터트려서 물이 솟구쳤다.

제일 먼저든 생각은 "얼마면 고칠까?"였고 H 선생에게 빨리 사람을 부르라고 했다.

H선생이 한 말."형님, 이런 걸로 사람 부르면 농사 못 짓심더".

 곧이어 필요 부품 도구를 갖고 와 배수관을 수리하였다. 

그때 일을 도우며 어깨너머로 본 것을 강물을 퍼서 과수원 물탱크를 채우던 첫 2년간은 

송수관을 관리하느라 여러 차례 써먹었다.


웬만한 도구가 준비되어 있는 지금도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굴 불러야지?"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니

머리는 아직도 서울에 있다.


농부는 공돌이다

중학생 때 사회 선생님이 미국의 농부는 자가용을 타고 가서 농사일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웃었다, 농부가 자가용이 있다니... 그때의 자동차 보유대수가 몇십만 대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이상하고 부러운 일이었다.

자동차 보유대수가 2천만 대를 넘은 지금은 우리에게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농사일도 바뀐 외형만큼 내용도 달라졌다. 

호미, 삽, 낫, 괭이 등이 주된 생산도구였던 시절에서 경운기, 관리기, 방제기, 제초기, 파쇄기 등의

"00기"가 주된 생산도구가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계는 전술한 것과 더불어 트랙터, 운반기, 

고소작업차와 트레일러까지 모두 9종류인데 그중 8개가 바퀴나 궤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공돌이여야 한다.


파쇄기와 경운기는 전주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과거 4년 동안에 구입한 것이다. 

전에부터 있던 것은 물론 새로 산 기계도 체계적인 교육, 그런 것은 없다.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한번 해보라고 하면 끝. "다른 질문 없으시면 저희는 갑니다." 그들은 가고 나는 기계와 남았으니 그 기계는 내 것이고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책임이다. 어떤 경우에는 매뉴얼이 나중에 오는 경우도 있고 아예 요청을 안 하면 주지 않는다. 왜? "달라고 하질 않으니까요.".


이사한 첫 봄에 물려받은 파쇄기를 몰며  가지를 파쇄하다가 몸의 균형을 잃어 장갑 낀 손가락이 파쇄기 고무벨트에 닿았는데 왼쪽 집게손가락 첫마디의 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일주일간의 입원과 한 달간의 기브스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로 인해 두 단계로 접히던 손가락이 한 단계만 접히게 되었지만 의사선생은 엄지와 검지로 오케이 사인은 만들 수 있으니 그만해도 아주 다행이라고 했다. 

좋은 일도 아닌 데다 집에 알린다 한들 도움이 될 상황이 아니어서 조용히 혼자 처리하기로 하였고

난생처음 입원을 그것도 지방의 조그만 병원에 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주로 "내가 왜?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라는 처량한 생각을 하다가 "이만하면 다행이다, 좋은 액땜"으로 바뀌어 간 것은 막 시작한 평생직장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위한 위안이었지만 그로 인해 기계와 안전에 대해 심각하게 접근하게 된 "좋은 액땜"이기도 했다. 퇴원한 후에 창고를 돌아보다가 나를 다치게 한  벨트 부위를 덮는 덮개가 있는지를 나중에 알았다. 


등에 메고 풀을 깎는 제초기가 고장 나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고쳐왔는데 잠깐 돌다 멈춰버렸다.

다시 15킬로미터를 가지고 가서 불평을 하니 가는 동안에 휘발유 새지 말라고 코크를 잠가놓았는데 왜 열지 않고 썼냐고 야단만 맞고 돌아왔다.  


평소에 교통사고, 자전거 사고, 스키장에서의 사고를 놓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하는 지만 알고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규범은 배우지 않는 게 문제라고 목청을 높였는데 결국 나 역시 진실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기계의 이용방법만을 알고 덤빌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쓰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나 사람이나 제대로 된 관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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