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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Aug 26. 2018

봉화군  총기사고를 접하며

우리 동네 면사무소인데...

사건이 발생한 면사무소는 우리 동네 면사무소이고 사망한 주무관은 서로  인사하는 사이였다. 군청 합동분향소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는 소천면장의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비명에 간 젊은 사람들의 영정사진을 보고 나오며 그에게 위로의 짧은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었다.


물과 쓰레기 소각 문제로 동네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면사무소에 신고했으나 처리에 불만을 가진 70대 독거노인이 엽총으로 갈등 당사자에게는 부상을 입히고 면사무소의 담당계장과 주무관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붙잡힌 사건이다. 총기사건 자체만으로도 쇼킹한 일이지만 나 자신이 적지 않은 나이에 귀농한 사람이고 바로 우리 동네 면사무소에 일어난 일이기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범인에 관한 신문기사

77세로 수원에서 살다 가족과 떨어져 봉화로 단독 이주. 원예사업으로 돈을 벌었고 나이 들면 시골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고 봉화사는 해병대 후배 소개로 내려왔으나 후배 사망. 인근 사찰과 물 문제로 다툼이 있고 또 사찰의  무단 쓰레기 소각 건으로 면사무소에 냄새 측정을 요구했으나 소용이 없자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사건을 일으켰다고 함. 범인은 제압을 당하며 한 말이 "나는 죽어야 된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인한 벌금 외에 전과 없음.


이 사건에 나타난 몇 가지 이슈들은 무모한 행동으로 인한 참혹한 결과를 빼면 귀농 혹은 귀촌의 대표적인 문제들로 주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갈등들이다.


주거 infra의 부재와 면사무소 역할

과수원으로 이사 와서 농업경영체 등록을 위하여 산업계 계장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은 "A급지로 이사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였다. 왜 A급지냐는 질문에는 "그럼요, 길 있고 전기 있고 인터넷 있고 물 있으니 A급지지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 살겠다고 길 내 달라, 전기 설비 도와달라, 물문제 해결해 달라는 민원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도 길이나 전기는 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다. 땅 사서 길 내고 한전에 돈을 내면 전기는 해결되지만 없는 물은 어찌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모든 땅이 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다. 물문제는 이주민과 원주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주민 간에도 다툼의 소지가 많은 문제이다.

쓰레기 소각도 화학제품이 적었던 예전에는 문제가 덜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플라스틱류 소각 시 방출되는 다이옥신은 무거운 분자여서 멀리 가지고 않고 소각장 주위에 내려앉아 생명체와 토양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얘기하면 환경론자인 별난 사람으로 분류되어 편안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시골의 쓰레기 수거는 제한된 지역, 예컨대 면사무소 소재지 동네 등에 국한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어쨌건 편안한 노후생활이든 귀농을 위한 것이든 땅을  사서 살러 왔으면 기본적인 주거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갈 곳은 일차적으로 면사무소 밖에 없다. 거기서 해결 안 되면 군청으로. 면사무소는 그 외에도 농사에 관련된 여러 보조 및 지원사업을 관할하여 갈 일이 많다. 가는 일이 많은 만큼 처리에 대한 불만도 많을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사건 기사에 첨부된 댓글 중에 면사무소 직원 혹은 그들의 업무처리에 불만을 토로하는 글도 많이 보았다.


내 경우에는 봉화 생활 1년에 면사무소 출입 횟수가 서울 5-10년 동사무소 출입 횟수와 같다고 생각한다. 도시에는 다 있기 때문이다. 전기,  수도,  물. 데이터 통신까지, 그런 문제로 갈 일이 없다. 60년을 서울서 살면서 동사무소엔 각종 증명서 발급으로 다녔을 뿐 그 외에 다른 볼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또 전기, 수도 , 물에 관련된 불편사항은 대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영선실에서 해결해 준다. 주민이니까, 관리사무소 영선실 입장에선 고객 겸 고용주 즉 "갑"측에 가깝다.


그럼 면사무소 직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면사무소의 업무처리에 불만이 있는 사람만큼이나 외부에서 이사 온 민원인의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에 짜증내는 직원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는 다른 사항들을(기존 주민들은 이미 전기, 길, 물이 있다.)을 다른 태도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이 덜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신규 이주자의 말보다는 기존의 영향력 있는 마을 어르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또한 어찌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 말하는 사람의 뜻은 듣는 사람의 이해에 달려있으므로 내가 하는 말이 의도치 않게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데다 일반적으로 "갑"의 입장에서 말하던 주제이기 때문에 듣는 면사무소 직원을 더욱 피곤하게 할 수 있다.


결국은 서로 다른 환경의 다른 프레임에서 지내던 사람들의 만남으로 생기는 갈등이다."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오래된 서양 속담이지만 지금도 되새기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 사는 것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또 고금을 막론하고 기본적인 성정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 오는 사람들이 소위 A급지에 자리를 잡기를 바랄 뿐이고 서로 다른 프레임에서 살아왔던 것도 잊으며 안된다.


시골에서 편히 쉰다는 것, 자존감 그리고 인간관계

시골에 오게 되는 몇 가지 경우 중에 귀농과 귀촌은 이주의 목적이 농업이냐 아니냐로 구분이 된다. 사과농사할 만하냐는 지인들의 물음에 농반진반의 대답은 "장점은 할 일이 많다."라고 단점도 " 할 일이 많다."라고 대답한다.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그래서 사는 재미가 있고 작목반등의 모임을 통한 교류고 가능하다.

가끔 귀촌을 했으면 서울로 돌아가도 벌써 돌아갔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너무 편해도 재미가 없다.


범인은 아로니아를 재배한다고 신문에는 나왔있지만 봉화귀농인협회 밴드에는 아무 농사도 안 짓다는 글도 있다.  농사를 지으면 혼자만 할 수 있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동네 사람들과 교류를 안 할 수 없지만 농사가 없으면 본인이 나서서 자신을 낮추면서 관계를 맺지 않는 한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가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도 나이가 많으면 더욱 힘들다.


편히 쉬러 간 시골에서 물 문제가 있고 주위에서 쓰레기를 태워 냄새를 피우면 열 받을 만한 일이기는 하다.

범인은 편히 쉬는 대신 혼자 있는 시간들을 분노를 증폭시키는 데 사용했을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왕년엔 안 그랬는데"  혹은 "지금 나를 무시하나?" 란 생각을 가끔 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생각들을 계속하면 자존감을 비정상적으로 강화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정작 갈등 상대방에게는 부상을 입히고 외견상 제삼자의 입장이지만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면사무소 직원들을 살해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어느 사람말대로  가해자가 물리적인 곤역을 당했다면, 나이는 먹었고 수모와 수치감은 크고 맡겨놓은 엽총이 있다면 나라면 어찌했을까? 


지난 4년 반 동안 귀농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혹은 그들과 기존의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보이는 뚜렷한 증상 중에 하나는 친소관계가 굉장히 빨리 발전하고 또 빨리 붕괴되어 절친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비교적 흔하고 또 이유 없는 자발적인 단절의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 경험에 비추어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일이 많은 이유는 사회심리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연구주제가 될만하다고 생각 한다.

열린 자연속의 폐쇄적인 인간관계의 상관관계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나와의 간격

사건 후에 여러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 왔다. 같은 귀농인중엔 그는 행동으로 옮겼고 나는 생각만 했다고 농하는 사람도 있었다. 범인이 전과도 없고 수원에 가족이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편안한 생활을 위해 봉화를 찾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와 혹은 다른 이들과의 차이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 충격이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을 여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희생자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그 두분의 가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또한 가해자의 가족들에게도 연민의 정을 느낀다. 가해자가 현장에서 죽지 못한 것은 그 죄에 대한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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