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마을길걷기 - 10월
▪코스: 법전면사무소-양지말, 음지말-경체-법계서실-척곡교회-삼의-나무피리 황토방-사미정계곡
이번 마을길 걷기는 법전면 길이다.
사과수확철이라 사람이 없을 것을 각오하고 늦게 공지를 하였다고 했는데 과연 사람이 적어서 총 8명이 걸었다. 그중에 강선생님 부부 두 분은 첫 참가이신데 내 이름을 부르며 그분이 아직 안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내가 10년간 모셨던 직장상사의 고교동창 분으로 연전에 전화상으로 인사를 하였던 분이었다. 법전면이 고향으로 10살에 떠나서 서울 사시다가 57년 만에 귀향을 하신 분이다. 좌장인 송 선생 왈 " 확실이 잘 살아야지 어디를 가나 다 연결이 되는 세상이에요". 맞는 말씀. 그러나 정작 봉화는 역사적으론 은둔의 땅 혹은 도피의 땅이었다. 난이나 사화를 피해 혹은 명나라를 섬기다가 오랑캐 청을 섬길 수 없어서 등등의 이유로 정감록 십승지 중의 하나가 있는 봉화 땅으로 스며들었다. 봉화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금씨와 정 씨가 있으며 오늘 출발점인 법전면은 진주 강 씨 또한 버제이 (법전) 강씨가 세거한 곳으로 예전에는 한옥이 많아 비를 안 맞고 다닐 만큼 세를 누렸다고 한다. 오늘 8명 중 두 분이 강 씨였는데 첫 참석하신 강선생님 말씀으로는 예전에는 법전면사무소 직원의 90% 이상이 강 씨였고 타 성씨도 외가 등으로 강 씨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했.
병자호란 이후 그 치욕에 파주에서 봉화로 내려온 강흡, 강각 형제분이 버제이 강 씨의 시작인데 두 분은 조선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고마침 마을도 당시에는 순흥 법전(양지말)과 안동 법전 (음지말)로 나누이져 후세에는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봉화군청에서 발한 자료에 의하면 양쪽 마을에서 260년 동안 대과 급제를 25명 (양지 12명, 음지 13명)이나 했다고 하는데 양쪽 간의 경쟁구도도 일조를 했을 법하다. 대과 급제자를 제일 많이 배출한 가문은 퇴계 이황 선생의 진성이 씨 가문으로 450년 동안 34명이라 하니 버제이 강 씨 가문의 대과 급제자 수는 엄청난 숫자이다. ( 봉화의 기찻길과 함께한 삶의 이야기- 봉화군 참조)
머리 사진으로 사용한 경체정은 지나다니면서 멋진 풍경을 즐기기만 했는데 추사 김정희 선생의 현판이 있는지는 몰랐다. 사진상의 우측이 추사의 글씨고 좌측은 당시 영의정이던 영어 김병국 선생의 글씨다. 동행한 수정 선생에 의하면 김병국 선생의 글씨체는 당시 유행한 현판서체라고한다. 안타깝게 추사의 현판 원본은 분실했다고 하는데 오늘 저 현판을 대한 것만으로도 나는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유흥준 씨의 최근 책 '추사 김정희"에 나온 표현, '금석기가 있는 예서체' 가 내가 좋아하는 추사의 그림 같은 글씨다. 경체은 주위의 개화 나무, 비자나무 그 앞의 인공연못과 어우러져 한참 봐도 지루하지 않은 한 폭의 그림이다.
경체정을 지나 음지말의 기헌고택을 둘러보고 한옥으로 짓는 권역센터와 그 앞의 소규모 운동장이 부디 잘 활용되길 기원했다. 기헌고택의 대문에 글씨가 중국인들처럼 "복"자와 다른 글들이 거꾸로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글씨(전서체?)도 멋져 보여 여쭈어보고 배울 기회였지만 진행상 생략한 것이 아쉽다.
다음 행선지는 법계서실, 해은 강필효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1860년 건립되었는데 그는 조선 후기의 소론 학맥 이룬 대표적 유학자라 한다. 음지말에서 태어나신 강 선생 님에 의하면 일 년에 몇 차례 문중 모임도 열린다고 하는데 사방이 나무 문으로 둘러쳐져서 덜 추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가을 단풍과 어울린 건물이 한껏 운치가 있었다.
법계서실을 지나 척곡리의 척곡교회에 대해서는 마을길 걷기 좌장 송 선생의 척곡교회에 관한 글이길지만 읽을 필요가 있다.
"척곡교회는 경북 봉화군 법전면 산골마을 척곡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인구가 줄어 10여 명의 성도가 이 교회를 지키고 있지만 경북 북부지방 초대교회들 중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을 성도들을 중심으로 세워져 의미가 깊은 척곡교회는 교회 부지 안에 교육기관까지 설립, 조국 독립을 위해 후진 양성에도 힘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척곡교회가 세워진 때는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를 지낸 김종숙 목사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야소교(예수교의 음역어)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가족들을 데리고 처가가 있던 봉화군으로 낙향해 전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낙향 초기 김 목사는 30리 떨어진 상운면 문촌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내 척곡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도실을 세웠고 이것을 교회로 발전시켰다. 이어 ‘명동 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민족 교육에도 힘썼다.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김 목사는 1926년 교단 목사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적발돼 모진 고초를 당했다. 광복 직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민족의 구원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척곡교회는 이제 김 목사의 손자인 김영성 장로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김 장로는 교직생활 은퇴 후 척곡교회를 지키기 위해 아내 안난희 권사와 재작년부터 이 곳에서 생활하며 교회의 역사성을 외부에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또 고령에도 불구하고 100년 사 발간 및 김종숙 목사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김 장로의 노력으로 최근 척곡교회는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됐다.
척곡교회는 당시 기역(ㄱ) 자 내지 일(一) 자로 지어진 초대교회들과는 달리 9칸 규모의 정사각형 기와집 예배당으로 지어져 역사적 가치가 높고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초기 교적부를 통해 당시 경북 지역 기독교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봉화에 이런 교회가 있었는지 몰럈다. 100년 전 선교사가 아닌 신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
교회를 관리하는 김장로 님은 올해 연세가 94세이신데 아주 정정하셨다. 인근 춘야 초교의 교가를 작사 작곡하신 외에도 여러 곡을 작곡하신 작곡가이시면서 교장으로 퇴임하신 분으로 우리를 교회로 안내하여 간단한 설명을 해주셨다.
김장로 님의 제안으로 그분의 피아노 반주로 돌아오지 않는 독립군 오빠를 생각하는 최순애선생 작사 "오빠생각"노래와 김정구 선생이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노래를 불렸다. 교회에서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를 부른 것은 처음이나 "독립군"이라는 주제라 가능했을 것이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사미정으로 가는 길에 대추나무가 심긴 논 옆에서 뭔가를 주워 담는 (?)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직 달려있는 대추를 따 먹으며 여쭤보니 메뚜기를 잡는 중이라고 하신다. 요즘은 다시 돌아와서 메뚜기가 많다고 보여주시는데 2리터 페트병에 가득이다. 어릴 때 아버님 술안주로 빠지지 않던 음식.
종착지인 사미정은 수려한 계곡에 높이 자리한 정자로 옥천 조덕인 선생이 1727년 건립하였고 현판은 정조 조 명재상인 채제공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사미정 옆에 있는 정원 가든에서 백숙을 먹었는데 닭과 많이 안 친한 내입에도 맛있었다.
언제나처럼 송 선생이 먼저 와서 주차해 둔 트럭의 적재함을 타고 원점으로 회귀하던 중 들른 "나무피리"집의 조성용 김연희 부부가 오늘의 걷기를 마무리하는 대미를 장식하며 저마다의 가슴에 방점을 찍게 했다.
경기도에 있을 때 유명한 목관악기 제작자였다는 조 선생은 근래 힘든 병에서 회복하는 중이라 하셨는데 그의 작업실에는 온갖 소리 나는 나무로 만든 악기들이 가득했다. 대나무가 아닌 나무로 만든 대금소리도 좋았지만 인디언 플륫을 연주할 때 약간의 낮은 음색 (그러나 대금보다는 높은)의 소리가 아주 애잔했다. 안주인 김 선생의 특기는 돌 쌓기로 주위 석축과 계단 등이 내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한 마디에 "아 이분이 돌쌓를 하다가 득도를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씀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아주 섭섭하지만 그분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느낀 김 선생의 그릇이 아주 커서 그걸로 충분했다.
조만간 무인 찻집을 운영하실 예정이라고 한다.
총 9.3킬로미터의 짧은 거리, 추사 현판부터 시작하여 곳곳에 포진한 의미 있는 장소와 건물 그리고 열정적인 사람들로 인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은 인문학 산책길이었다. 청명한 가을날은 가끔씩 낙엽을 몰고 다니며 분위기를 띄워주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