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풍경
내가 사는 지역은 낙동강 상류지역이다. 강은 산에서 시작하니 강의 상류는 대개 산태극 수태극을 그리며 냇물을 모은다. 우리 마을 위쪽으로 들어온 강물은 마을을 좌측으로 두고 비껴나간다. 강을 건너면 바로 길 옆으로는 산이 있고 흘러가는 강물은 다시 산을 만나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우리 마을을 직사각형 공간에 가두어 놓는다. 아침 빛도 산을 넘어와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저녁노을은 매우 강력한 노을이 있는 경우에만 건너편 산 위로 분위기만 전해준다. 그러나 다행히 산을 넘어온 빛들이 다시 산을 넘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 작물들이 잘 자라서 어떤 이는 내가 사전 정보 없이 순전이 발품으로 땅을 샀다는 것을 놀라워한다. 대개 좋은 땅은 마을 사람들의 주변 사람들이 사게 되기 때문이다. 직사각형 하늘 아래 몇 채 안 되는 집들과 저마다의 뚜렷한 경계가 있는 밭들 그리고 그사이를 지나는 길이 높낮이를 따라 흐르며 우리 마을 풍경을 만든다. 경북이지만 강원도 태백과 인접해 있어 봉화 사는 이들조차 강원도 분위기가 난다고 한다.
길게 마을을 묘사하는 이유는 몇 집 안 되는 구성원들과 정해진 밭의 크기 등, 그 단순한 구성요소로 늘 변함없이 보이는 한가한 풍경을 그려보게 하기 위함이다.
늘 한결같아 보이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달라지다 어느 순간 문득 눈에 들어 계절을 느끼게 한다. 늘 같아 보이지만 매 순간 달라진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를 보면서 내 생각 많이 했다고, "브루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언제 와인 한잔 들고 여유 있게 보리라 미뤄두었지만 예고편 사진 몇 장에 시선이 멈췄다. 큰 나무와 포도밭 사진, 앵글이 정확히 고정되어 사시사철의 변화를 보여준다. 내게도 똑같은 생각으로 지나가다 멈추어 대충 핸드폰을 눌러대는 두 지점이 있다.
변화를 인식하는 우리의 의식은 아니 나의 의식은 어제와 오늘 사이의 미세한 차이는 잘 인식을 못하는 듯하다.
"어 많이 컸네, 어 벼가 여물었네, 벌써 가을이네"로 어느 날 눈에 든 변화는 인지하지만 직사각형 하늘 아래 눈에 차는 풍광은 늘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울로 본 내 얼굴과 같다. 매일 세수하며 보는 얼굴은 늘 같은 얼굴이건만 일 년 전 사진만 봐도 그사이 너무 늙었다.
보는 것이 곧 생각과 연결되고 생존과 연결된다면 나는 아직 시골에 사는 도시 쥐인 셈이다. 도시에선 내 주위의 사물을 이름으로 판단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직장에서는 때론 이면의 내용이나 생각이 더 중요 하긴 하지만. 시골에서는 이름만으론 안된다. 전체를 보고 또 마치 '육백만 불의 사나이"처럼 망원으로 끌어당겨 세부를 봐야 한다. 과원에서 사과나무 사이를 걸으며 사과나무를 전체 아우트라인만 보고 걸으면 다리만 아프고 되는 일이 없다. 가지의 모양새, 대목 부위 주변의 이상 여부, 꽃눈의 분화 여부, 잎의 건강, 사과의 이상유 무등을 세세히 챙겨야 시골쥐가 된 것이다. 그렇게 자주 다니며 잘못된 것에 대해 신속하게 보정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곧 "사과나무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도시쥐들도 사는 것이 빡빡해져서 시골쥐보다 더 빨리 보고 더 많이 뛰어야 하니 시골쥐가 된 것이 다행이다.
사족 1. 넌 그동안 뭐 했는데?
강밭을 다녀오다 벼와 눈이 마주쳤다. 모내기가 엊그제였는데...
"난 이렇게 컸는데 넌 그동안 뭐 했는데?"라고 묻는 듯했다.
" 나도 이제 곧 사과 수확한다"라고 생각하며 농사 안 짓는 이들은 뭐라 대답할까 궁금했다.
사족 2. 이런 애들 꼭 있다.
요즘 수수는 예전처럼 키가 크지 않다, 왜성화를 통해서 성인 가슴 높이 정도까지만 올라온다. 우측 밭의 고른 키와 수확량에 비해 좌측 밭에 두 녀석은 키가 거의 두배가 된다. 어딜 가나 말 안 듣고 튀는 애들 꼭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