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새로 만든 창고 벽면 1/3에 해당하는 면적을 개방하고 선반을 달았습니다. 창고 자체가 트랙터 등의 기계류와 비료 등을 보관하는 건 창고라 눈, 비만 피하면 되기에 가능했습니다. 또 밭에 있으면서 밭을 보려면 창고를 나와야 하는 상황도 싫었습니다. 이제 공사는 끝났지만 마무리는 제가 해야 하기에 아직 너저분합니다만 제일 먼저 할 일은 지난번 친구들이 사 온 플라스틱 와인컵 하나를 저 선반에 붙여 놓으려 합니다. 요즘 캠핑이 유행하여선지 얼핏 보기에 유리잔 같은 플라스틱 와인컵이 훌륭했습니다. 와인을 종이컵 등에 마시면 맛도 맛이려니와 품위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저 창고 선반을 스탠드바 탁자 삼아 사과꽃 필 때, 달이 좋을 때, 별이 쏟아질 때, 사과가 빨갛게 익었을 때 혹은 가지만 남은 나무 위로 눈이 내릴 때 좋은 친구(들)와 같이 때로는 혼자서 와인 한 잔 하면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품위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분위기 있는 휴식"이 저 컵 속에 쓰여있는 문구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와인을 즐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격식을 차려서 품위 있게 지내는 것이 중요해진 듯합니다.
이번에 쓰가루를 출하하면서 그리고 홍로가 색이 들기를 기다리며 "품위"를 생각했습니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사과를 보내는 직거래는 내가 보내는 사과의 "품위"와 사과밭 주인의 "품위"가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과 한 알이 나의 품위를 순식간에 결정하게 됩니다. 댓글과 달리 제가 모르는 것이 아주 다행입니다만 이번에 품위를 생각하게 된 것은 사과의 착색에 관련하여 초조해지는 저 자신 때문입니다. 착색은 주야간의 일교차와 햇빛이 중요하다고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8월 들어서는 사과밭에 물을 따로 준 적이 거의 없을 만큼 비도 많았지만 색이 안 드니 초조해집니다. 걱정을 한다고 빨리 색이 들리도 없지요. 당연 때가 되면 색이 듭니다. 그때가 제 때와 맞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초조해하지 말고 그냥 접고 딴 일 하자, 노심초사하며 살지 말고 품위 있게 살자, 느긋하게 기다려." 어차피 결과는 같고 달리 효과적인 방도가 없는데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닙니다. 결국 "품위 있게 산다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는 것"을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일하면서 라디오에서 들은 " 동창회에서 자랑 실컷 하고 돌아오는 길의 씁쓸한 기분"을 언급하는 대목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자랑할 것이 별로 없지만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길이 후회로 가득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이 그렇습니다. 예전보다는 격식을 차리는 면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동일한 사항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입장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고 완강해지는 경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나름의 눈으로 사태를 개진하고 의견을 말하다 보면 돌아오는 길에는 " 쓸데없이 너무 말이 많았다"라고 자책하게 됩니다.
"내가 부탁하면 우리 딸은 그 회사에 넣을 수 있지만.."하고 안 했다면 또 " 우리 아빠에게 내 취직을 부탁하면 가능하겠지만.."하고 부탁을 안 했다면 또 해준다고 해도 안 가겠다고 했으면 문제가 없었겠지요. 장관 후보자가 여러 가지 소위 불법이 아닌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안 했다면 제가 모임에서 하는 말들이 훨씬 적어질 수 있었을 텐데요. 사실은 위의 모든 일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관행이거나 관습처럼 해오던 일들이지요. 장자의 시대에도 돈만 있으면 학식 있는 이도 찾아와 머리 조아리게 하고 명망이 생긴다고 했는데 하물며 오늘에야 더 말할 나 위 없지요. 높은 자리 혹은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달성하는 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안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품위 있게 산 것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품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쉬울 텐데 그렇게 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도 이상하긴 합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말 많이 했다고 후회하는 나도 계속 이리 주절대고 있으니 안 하는 것이 하는 것보다 어려운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