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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은 Oct 01. 2024

날씨가 좋아서 그대 생각이 났어요.

[Essay] 네가 배부르니 나도 배가 불러.

너나 많이 먹어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항상 청년들을 보면서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씀이다.

마음 한켠에는 "앗싸 개꿀!"이라 말하며 어떻게든 조금 더 큰 조각, 맛있는 부위를 먹으려고 애를 썼었다.



[1] 내 생일인데 왜 너희들이 더 맛있게 먹는거냐

 생일 때 받은 선물들이 정말 많았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내가 학생들과 지내는 것을 알고 계셔서 학생들과 맛있는거 먹으라고 간식들을 보내주셨다. 그냥 가끔 생각 날때만 연락주셔도 감동 받는데 나 뿐만 아니라 나의 주변까지 신경 써주시는 많은 분들 덕분에 올해의 생일은 감사한 마음이 정말 가득했다.

 그 중에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많이 받았는데 도저히 혼자 먹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어서 나중에 아이들과 나눠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같이 먹으면 좋았겠지만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쌤이랑 아이스크림 케이크 먹고싶은 사람~!?"이라 말하는 순간 각자의 숟가락을 챙겨서 이미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얘들아 쌤 숟가락은...?

야야 먹지마 먹지마. 쌤 생일 케이크인데 쌤은 아무도 안챙겨주냐.


 절대 서운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즐거우니까 나도 너무 즐겁게 서로 농담도 주고 받고 그냥 웃으면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다.




[2] 쌤은 학생 때 어떻게 지냈어요?

 학생들과 삶을 함께 살아내면서 항상 듣는 이야기였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창시절이 6년 뿐이라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재미있게 놀고 싶은 마음에 말을진심으로 잘 듣지 않는 학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수학이랑 과학을 좋아해서 공부는 열심히했었다. 다시 말해 우유부단 하고, 맥락 없고, 뜬금 없고 이기적이고 배려란 하나도 없는 학생이 바로 나였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사랑과 격려로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지만 가끔 학생 때의 나를 생각해보면 미친놈이 분명했다...ㅋㅋㅋㅋ

졸업앨범에서 발견한 고3 시절

[3] 20살, 첫 알바와 첫 풍요로움

 대학교에 가서 남들 다 해보는 알바를 하고 싶었다. 부유하지 않아서 나를 항상 도와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한달에 손을 달달 떨면서 10만원을 주시고 최대한 한달을 버텨보라고 하셨다. 나는 20살 동기들도 나랑 비슷하겠거니 생각했지만 중간고사가 끝났을 때즈음 동기들 용돈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시 최저시급이 4,800원 했었는데 50만원~60만원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버텨보라는 아버지 말씀에 점심과 저녁을 학식으로 버티고, 5km 이하는 전부 걸어다녔었다. 한달이 지나면 2만원이 항상 남아있었고 그 2만원으로 동기들이랑 십시일반 모아 맛있는거 먹으러 가기도 했었다.

 10만원이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 때 알바를 하고 싶었다. 나의 첫 알바는 설빙이었는데 돈을 버는 것이 엄청 힘들다는 것을 처음 느겼다. 그래서 과외도 여럿 찾으러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었고 교수님들께 부탁드려 연구실 기구 설거지부터 주변 중.고등학교 방과후 교사로 기간제를 하기도 했었다.


 과외 전단지를 돌리고 붙이는 중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학과와 대학교, 타대학교를 엄청 돌아다니며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 나누자고 해서 나를 포함한 3명이 모였다. 빈 실험실과 랩탑 3대를 가지고 일을 시작해서 나의 첫 사업이 시작되었다. (기회가 되면 스타트업 이야기를 풀어야겠다.)

 사업이 아니더라도 과외를 7~8개를 하며 한달 수입이 꽤나 괜찮아졌을 때 아버지에게 이제는 용돈 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엄청난 뿌듯함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더 이상의 짐을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나의 삶을 내가 잘 꾸려나가고 싶었다.




[4] 나를 위함 보다 다른 사람들

 용돈을 받았을 때 한달에 15만원 ~25만원 사이를 생활비로 책정했다.

이후에 돈을 많이 모으게 되더라도 나는 한달에 생활비는 30만원이었다. 벌어드려도 항상 남은 돈은 없는 돈이라 치며 적금통장에 바로 넣어버렸었다. 대충 나의 생활비가 25만원이라 치고 5만원은 항상 따로 비상금으로 두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관계에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을 일찍 깨달았다.

물론 현재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도 있지만 꾸준하게 연결이 되는 소중한 나의 사람들이 아직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조금 더 성장한 지금의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많아졌다.




[5]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오셨던 베스킨 라빈스

 어느 정도 단맛, 쓴맛, 매운 맛을 전부 맛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직도 맛을 보아야 하는 많은 감칠맛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경험하고 있다. 너무 힘들 때가 많았다.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항상 속으로 삭혀두기만 하고 끙끙 앓고 있기만 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스트레스 받으면 맛있는걸 사먹으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나서 학생들과 나눠 먹기 시작했었다. 나도 배가 부르고 학생들도 배가 부르는 그 순간이 너무 재미있기도 하지만 먹는 그 순간에 여러 이야기들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서로 풀어 나가는 그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 일을 지난 10년간 계속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들어간 돈만 생각해보면 아깝긴 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시간을 더 공유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즐거웠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정말 부르더라. 특히나 중.고등학생 말고 초등학생들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그냥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ㅋㅋ


[마지막] 


 옛날 어렸을 때 집으로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두 손에 베스킨라빈스나 족발, 치킨 시켜 먹는게 얼마나 가장 무거운 돈이었음을 돌아본다.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해서라도 그 시간을 만들어가는 아버지의 무거움을 지금 나도 느끼고 있다. 나중에 나도 자식이 생기면 돈보다 소중한 시간을 사려고 무겁게 돈을 사용하겠지?


오늘 날씨를 보아하니 나를 위해 특히나 힘을 써주신 많은 사람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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