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殘像)

: Romantic Film

by 유영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집 안 잡동사니를 쌓아둔 서랍 속 한켠 깊숙이 박혀 있던 필름 카메라. 그동안 한참을 잊고 지냈던 물건이니만큼 상당히 오래되었건만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건 하나하나를 소중히 보관하는 엄마의 성격 탓이겠지. 카메라는 케이스라고 할 것도 없이 볼품없는 지퍼백에 들어가 있었지만 아무렴 어때. 겉모습이 중요하지 않은 건 물건이라도 마찬가지인 걸.


그러니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 필름 카메라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보았던 물건이다. 문득, 내가 기억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였던 이것을 언제쯤 샀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엄마, 이거 언제 산 거야?"

"그거 아마 너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샀을 걸."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모의 디지털카메라를 종종 빌려 썼다고 했다. 사진 찍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내가 태어나고나서부터는 나를 남기기 위해 카메라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때 당시의 디지털카메라는 누구나 당연하게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형편이 좋지 않았던 우리 집에서 덜컥 그 비싼 카메라를 사긴 어려웠다고 한다. 지금은 당연하게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그때는 아직 스마트폰도 나오기 전인 시절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직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게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하신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도 당연한 것들에 낯설어질 날이 올까. 어찌 되었든 간에 그때 그렇게 엄마의 손에 들린 것이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필름 카메라라는 것이 묘하게 낯설다. 심지어 나와 거의 비슷한 시간을 품고 있다니. 어쩐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래된 물건이라도 다 언젠가 쓸 데가 있다며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성격은, 때로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난 아주 오래된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거기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건전지를 사서 끼워 넣었다. 편의점과 집 앞 마트에는 필름 카메라의 건전지를 팔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근처 오래된 사진관에 가서 필름 카메라의 건전지도 따로 판매하는지를 물었다. 운이 좋게도 딱 하나 남아있던 건전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사실 인터넷에서 아주 손쉽게 찾아 구매할 수 있었지만 그래봤자 직접 가서 구매하는 것의 기쁨만은 못하다. 겨우겨우 산 건전지를 카마라에 끼워 넣고 전원을 켰다. 20년도 더 넘은 물건이지만 제대로 작동을 하다니! 설마 하고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선물 같았다.


서른아홉 컷의 필름. 난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 들고 플라스틱 통 안에 넣어 현상소를 찾았다. 30분간의 기다림 끝에 받아본 결과물은 흐릿했다. 색도 선명하지 않았고 몇 장은 형체만 겨우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너무 오래된 필름이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른한 사진. 실로 빛바랜 추억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도 후회는 남지 않는다. 그 안에 나의 어떤 시간들이 담겨 있을지를 상상하는 동안 설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명하지 않으니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필름 사진 한 장 한 장을 들고 오랫동안 바라본 게 얼마만이었더라. 아주 오래된 나, 그 시절의 풍경, 내가 머물던 시간.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분명 아주 오래된 나인데 사진을 보니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오래된 영화관의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머릿속에 여러 장면들이 상영됐다. 난 필름을 현상한 것이 아니라 나를 현상한 것이었다. 14,000원. 잊힌 내 추억을 산 값 치고는 싸게 먹혔다.


필름은 굉장히 예민하다. 빛과 온도, 마찰이나 오염 여부, 또 얼마나 오래됐는지까지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다. 무심한 한순간에 상처 입고, 오래된 기억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만큼 선명해지는 순간도 있다. 스쳐지나 내게 온 낡은 필름 사진 한 장처럼. 그렇게 나도 필름처럼 언젠가의 기억 위에 천천히 인화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고 오래된 것에 담긴 잊고 지낸 것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게 되는 어떤 일들을 계속하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조금이나마 느리게, 아주 천천히 사라졌으면 좋겠는 것들만 가득하다. 다 닳아버린 풍경, 오래된 물건, 다시 꺼내든 기억. 그 안에는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너무도 정교한 감정들이 들어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한 것도 아닌데 왠지 그냥 눈물이 나는 건 그리움일까.


그리움은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진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잔상은, 늘 그리움과 함께 찾아온다. 빛은 이미 사라졌지만 마음은 아직 떠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 잔상(殘像). 참으로 잔인하다.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더 선명히 아프다. 전부 기억하지 않으면 그만일 테지만 마음이 그럴 수 없다. 낡은 필름으로 펼쳐진 나는, 오직 나만이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다시 틀어볼 수는 있어도, 다시 찍을 수는 없기에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낭만은,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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