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을 쉬듯,
우리가 살아가며 집착하듯 붙드는 것들은 모두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하면 아가페(Agape), 스토르게(Storge), 에로스(Eros)적 사랑같이 숭고하고 이타적이거나 로맨틱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람 간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한정된 무언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느끼는 건 우린 이미 사랑의 연속인 모든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과 만든 밴드, 혼자서 몰두한 캔버스, 어쩌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철학 같은 것들. 그 불씨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허기를 덮고, 허기의 자리를 새로운 모양의 빛으로 바꿔놓는다. 보통은 꿈이나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던 것들이지만,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분명 남들 하는 것만큼 열심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만 공허한 감정이 느껴진다면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때에 자신이 누구인지 보게 된다. 타인의 눈 속에 비친 낯선 나를 마주하면서 내가 얼마나 변할 수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꼭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라던가, 스쳐 지나가는 노래 한 소절이라던가, 정말 사소한 조각들이 나에겐 큰 의미로 다가와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무엇인가를 통해 나에게 닿는 기묘한 우회. 어쩌면 당신이 뱉은 무의미한 말도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닿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다면 삶은 그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공간이 이어지는 직선 속에서 불현듯 끼어드는 곡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고, 효율을 중시하는 세상 속에서 사랑은 사치고, 사랑조차 완벽하게 조건을 따져서 남들보다 성공해야 한다고 느낀다. 살면서 느끼는 이유 없는 공허는 대부분 그러한 일상의 반복에서 태어난다.
평평하게 늘어진 하루 위로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매번 흔적을 남긴다. 빗방울이 닿은 자리에 남은 흔적은 늘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낸다. 내가 몰두하는 사랑도 그러하다. 매번 진심을 다해 사랑하면서도, 매번 내가 만들어내는 흔적은 다르다. 가장 중요한 건, 흔적은 사라져도 사랑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당신은 더 이상 예전의 당신이 아니다.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사랑을 할 때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아무리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믿어도 작은 것 하나에 무너지고, 또 그 작은 것 하나에 다시 세워지는 자신을 확인한다. 감정은 요동쳐도 무너짐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사랑을 통해 자신이 완벽히 닫힌 존재가 아니었음을 배우게 된다.
내가 사랑한 순간들은 늘 불완전했다. 너무 짧거나 너무 길거나, 서툴거나 지나치게 뜨겁거나. 그 모든 실패와 불균형이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들었다. 그 어떤 것도 완벽을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이 없이는 내가 나일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매번 미끄러지면서도, 또 미끄러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손을 뻗는다. 왜냐면 그 모든 흔들림 속에 내가 사랑할 것들이 숨어 있으니까.
시든 꽃을 책 사이에 끼워 넣는다.
오래된 편지를 꺼내 접힌 자국을 따라 손끝을 문지른다.
화판 위는 마르지 않은 물감으로 채워져 있다.
말없이 스며든 냄새 하나가 나를 다시 아이처럼 만들어 버렸다.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 홀로 앉아 마이크를 쥔다.
공터에 핀 들꽃을 괜히 꺾지 못하고 돌아선다.
반짝이는 고층 빌딩 사이, 투명한 창문 너머의 나.
눅눅한 새벽, 창문을 열고 쏟아지는 별빛을 손에 받아본다.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는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있느냐로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감정은 찻잔에 남은 온기처럼 쉽게 식지 않는다. 이따금 우리는 그런 감정들을 낭만이라 부르곤 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건 필요하지만, 삶까지 이성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 모든 다름을 받아들이기에 다름이 아닌 사랑으로 느낄 수 있다.
삶에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설명보다 체험에 있다.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열기는 가슴에 남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우리를 다음으로 이끌고, 더 많은 무늬를 남기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사랑은 삶을 움직이는 가장 오래된 갈망이자, 우리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쉽게 놓지 못하는 영원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