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幻)

: 애초에 환상일지라도

by 유영

나는 만남과 이별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누군가는 몇 년 동안의 장기연애를 당연하듯 말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신기한 일이었다. 설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늘 끝에 남는 것은 의리인지, 습관인지 그 두 가지를 넘나드는 이름 붙이기 애매한 무언가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적당히 긴 연애를 지극히 정상이라 부른다.


솔직히 첫눈에 반한다는 게 아직도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완벽히 짜인 각본 속 한 장면에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빛의 각도와 그림자의 길이가 절묘하게 겹쳐지는 순간처럼. 나는 아직 그런 순간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떠오르는 건, 첫눈에 반했다기보다 대부분은 스쳐 지나가던 상대의 작은 행동이 갑자기 내 안에서 낯설게 반짝이거나, 혹은 소개의 자리에서 억지로 맞춰 앉은 이성의 얼굴일 뿐이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가끔은 상대가 내 삶을 자기 자신의 삶인 줄 착각하고 멋대로 다루려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내가 고르지 않은 색을 들이밀고, 원한 적도 없는 무늬를 입히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언제나 모양이 정해져 있다. 그 틀을 벗어나면 불완전인 거고, 비정상인 것이 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가 가장 진하게 느끼는 감정을 분명 남도 똑같이 겪고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내가 외로우니 너도 외로울 거야. 내가 이걸 원하니 너도 갖고 싶을 거야.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버린다. 하지만 그와 내가 느낀 감정이 서로 닮았을지언정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껴안고 살아간다. 사랑이라 하면 아름답다. 환상적이다. 그리고 한정된 사랑이 바로 그 예다. 특히 연인과의 진실되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랑. 언제나 그렇듯, 꿈이 꿈인 것을 알게 되는 건 꿈에서 깨어난 순간이다. 환상은 결국 헛된 단꿈이다.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붙잡을 새도 없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은 남들이 굳이 내 손을 펼쳐 빼앗아가려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펼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꿈인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늘 이별을 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지속될 것 같은 사랑을 택하기 위해 조건을 붙인다. 외모, 성격, 능력, 집안, 혹은 그냥 외로움의 공백. 사랑을 선택하기보다 지속 가능한 가능성을 선택하는 일. 하지만 그 안에서 꿈은 자라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것은 환상이지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사랑받고 싶은, 그 갈망.


그런데 환상을 좇는 동안, 나는 타인을 찾는 동시에 나 자신을 확인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를 사랑할수록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더 선명히 보인다. 내가 더 환히 웃고 있을 때면 나는 그게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닮았다. 하지만 나도 그를 닮았다. 그러니 거울 속의 내가 웃는다고 해서, 진짜로 웃고 있었던 건지는 모를 일이다.


불타는 사랑은 순간의 불꽃처럼 나를 집어삼킨다. 그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은 내 안의 허기를 태우는 불과 같다. 모든 눈부신 순간을 지나 펼쳐본 내 손 안에는 재만이 남아 있었다. 아직 따스하다. 하지만 곧 차갑게 식어버리겠지.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릴 거야. 재는 보잘것없고, 버려야 하는 거니까. 결국 남아 있는 재의 온도가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사랑은 불꽃인가 재인가.

잔잔한 사랑은 오래된 호수와도 같다. 평화로운 수면은 내 얼굴을 더 선명히 비춘다. 계속해서 바라보다 보면 어느 것이 내가 비춘 그림자인지, 어느 것이 상대가 내게 건네준 얼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너를 사랑하는 건지,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모두들 사랑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언제나 타인을 향하는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대부분 자신을 향해 있다. 품 안에서 안도하는 것도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다. 그래서 난 타인에게 내 심장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 그 타인을 거쳐 다시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사랑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언제나 사랑을 믿는다. 믿고 싶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환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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