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偶然)

: 여수행 막차

by 유영



그 시절의 여름,

매일 밤 함께 산책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딱히 약속을 정하고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가 저물면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만나 동네를 걸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게 하나의 루틴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늘 즉흥적이었다. 같은 길로 한 두 번 걷고 나면 다음번에는 꼭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 골목으로 발을 들이고, 동네마다 다른 공기를 느끼고 싶어 괜히 낯선 길로 향하곤 했다. 겁도 없이. 어쩌면 익숙한 곳에서 자라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모순된 욕망일지도 모른다. 길을 잃고 싶었다. 길을 잃었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긴장감 때문에. 거기에 불가항력적인 밤의 낭만까지 스며들면 어두운 골목조차도 따듯하게만 느껴진다. 밤은 밝고 낮은 흐릿하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날도 늘 그렇듯 밤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다는 친구의 말에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낭패였다.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발길을 돌리려는데 바로 근처에 기차역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우습게도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기차역은 아직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그곳으로 향했고 다행히 역사는 우릴 반기듯이 아주 환하게 열려 있었다.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대합실에 멍하니 서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기차역 내부의 전광판을 올려다본 순간 눈에 띄던 행선지 하나. '여수행'. 여수행 막차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탑승까지 남은 시간도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나는 때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친구에게 전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갈까?"

"가자."


친구는 끼리끼리라더니 누구 하나 이 상황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 둘 다 말려줄 사람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어느새 여수행 기차표를 손에 쥐고, 그 새벽에 핸드폰과 지갑만 들고 여수로 향하게 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여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주위는 온통 어둠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인적도, 불빛도. 공기는 바닷물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끈적한 여름의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정말로 여수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대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루 2만 보쯤은 아무렇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허기가 졌지만 밥집은 전부 문을 닫아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끼니를 해결했다. 하지만 낯선 밤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술 한 모금 없이도 들뜨고, 여수 밤바다를 흥얼거리며 진짜 여수의 밤바다를 마주했다. 눈앞에 보이는 잔잔한 파도 위로는 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해가 떠오른 뒤엔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시장으로 향했다. 메뉴는 당연히 간장게장. 나는 사실 그다지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친구는 무척 좋아했다. 여수까지 와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기에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먹기 직전에야 친구에게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심한 편은 아니라 먹고 알레르기 약만 먹으면 괜찮다며, 웃으며 젓가락을 들던 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먹고서 입술이 살짝 부어오르자 근처 약국으로 가 약을 사 먹었고, 그 상황이 우스워 둘 다 한참을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조차 즐거움으로만 남았다.


정말 또 얼마나 걸었을까. 아침부터 게장을 먹고, 또 여수 바다가 보이는 예쁜 카페를 가겠다고 열심히 검색해 찾아낸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면 편의점에서 충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여행이라며, 마지막에는 하멜 등대까지 가서 사진을 남겼고 그때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 후에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깊이 잠들어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돌이켜보면 여행에서 가장 선명히 남는 장면들은 늘 묘하다. 한여름 땡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다니던 순간이라던가, 괴로워하며 새벽같이 공항으로 향하던 발걸음 같은 것들. 그때는 분명 여행 중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고통도, 고통 그 자체로 온전하지 않다.


숙소도, 식당도, 교통편도 다 짜여 있는 여행보다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걷다가 마음에 들면 멈추고, 피곤하면 눕는 여행이 좋다. 대부분 고생했던 여행이 더 오래 남는 건 그만큼 마음이 헐벗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계획은 그 가벼운 마음에 틈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틈으로 삶의 우연과 낭만이 스민다.


그 이후로 수많은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까지도 가장 선명한 건 그날의 여행이다. 떠나겠다고 시작한 길이 아니라, 우연히 발이 닿아버린 즉흥적인 여정. 아마 그 무모함과 가벼움이 내 여행의 낭만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더 일찍 어딘가에 기록을 남겼더라면 더 많은 장면을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어딘가에 남겨둘 수 있어 다행이다.


어쩌면 여행이란, 모든 지도를 접어 넣고 가보자는 말 한마디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무모함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과 웃음을 선물해 주는 건 언제나 그런 길이었다. 여행이 그렇듯, 인생도 완벽한 계획보다 한 번의 무모한 선택이 아직 보지 못한 곳으로, 느껴보지 못한 순간 속으로 나를 데려가 주기도 한다. 그 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날의 여수가 이미 알려주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무계획의 낭만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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