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은 점이 있다. 대부분의 연애와 결혼에는 사랑이 빠져 있다는 것. 그 안에 있는 건 습관이거나 쾌락, 혹은 생존의 계산이거나. 그뿐이다.
요즘의 연애는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시작된다. 데이트 비용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상대의 외모는 어떤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학벌은 괜찮은지, 집안은 어떤지. 이러한 것들을 따지는 것이 먼저다. 이 사람을 저 사람에게 연애 상대로 마땅하다고 소개해주는 것 역시 이를 기반으로 시작된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만남을 갈망한다고 말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는 계산된 만남에 지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에.
연애가 이 정도라면, 결혼은 더 노골적이다. 원래 결혼이란 집안과 집안의 대사(大事)였다. 사랑이 아니라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결혼 역시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 세대보다 계층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지금, 결혼은 생존의 문제이자 계급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현대에서는 돈으로 계급이 분류된다. 그리고 이 돈은 아주 효율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결혼 정보 회사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비슷한 등급끼리 짝을 지어준다. 등급이 없다고 말해도 효율적으로 사람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서는 등급 같은 것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구조 안에 사랑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연애 시장, 결혼 시장이라는 말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사랑이 있다면 시장이란 단어는 붙지 않는다. 우정 시장이라고 해보자. 어색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SNS는 이런 경향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완벽해 보이는 커플, 잘난 사람들끼리의 결혼식, 눈부신 신혼여행 사진. 우리 눈에는 그들의 사랑보다는 그들의 스펙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호화스러울수록 더 행복해 보이고, 그럴수록 그게 더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은 사실 사랑이라기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남을 곁에 두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심심하니까 만나고, 마침 옆에 있었고,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 중에서 그나마 나아 보이고, 또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 하기에는 이상하니까. 이 모든 시작에는 사랑이라 부르기는 조금 어려운, 그저 공허를 채우기 위한 만남이라는 것이 깔려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에 관계를 통해 잠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쉽게 뜨거워지지만 그만큼 쉽게 식어버린다.
첫눈에 반한다는 감정 역시 대부분은 쾌락에서 비롯된다. 본능적으로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대상을 향해 분비되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우리를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건 본능이지,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남녀 간의 사랑을 그저 성욕이라 말한 쇼펜하우어. 정말 염세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인간은 종(種)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끌리는 대상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첫눈에 반한 사랑은 대개 빠르게 타오르고, 욕망이 꺼지면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조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본능 위에 세워진 욕망이지만, 나아가 본능을 초월하려는 욕망.
그렇다면 우정은 다를까? 사실 우정 또한 완전히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더 쉽게 좋아하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는 자연스레 멀어진다. 우정은 연애보다는 덜 타협적이지만 그 안에서도 나와 맞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선별적 사랑의 형태가 있다. 단지 연애보다 이해타산이 옅고, 감정의 소모가 적다는 점에서 조금 더 순수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정이 더 높은 차원의 사랑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속에 사회적 의무도, 생존의 압박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결국 내가 편안한 관계를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완전히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타인을 나로 여기는 일이라 생각한다.
대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다. 때로는 친구가 친구를 아끼는 마음도. 또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이런 관계들 속에서 조건은 뒷전이 된다. 작게는 자식의 편식부터 살아가는 방식까지 알려주는 엄마의 잔소리. 친구가 위험한 연애를 하는 걸 보며 느끼는 짜증. 반려동물이 아프면 함께 아파하는 것. 결국 이 모든 것은 상대를 나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때, 타인을 나의 연장선으로 인식함으로써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처는 말했다. "모든 것은 하나다."
연기법의 가르침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세상은 서로에게 기대어 존재하며, 분리된 실체란 없다.
예수 역시 말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건 단순한 도덕 명령이 아니라 이웃도 곧 나라는 인식의 확장이다. 진짜 사랑은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조건이 사라지고, 분리의 감각이 사라질 때 욕망에서 해방되어 하나의 존재로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랑을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숭고한 것으로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랑이 단순히 너를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그런 거창한 희생일 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사랑을 더 멀고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점점 더 조건으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생긴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남의 행위를 통해 나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그런 것인가? 그냥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은 그 정도로 단순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를 통해, 나를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 모두가 결국 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이다. 좋은 날씨 덕분에 내가 기분이 좋았다면 그 또한 사랑이지 뭐가 사랑이겠나.
연애와 결혼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별의 이유를 떠올려 보자. 성격 차이, 돈 문제, 바람, 아픔. 그 모든 갈등의 근원에는 상대를 철저하게 타인으로 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사랑한다면서도 너와 나 사이에 단단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랑하니까 놓아준다"는 말이 허무하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오히려 쉽게 놓을 수 없다. 사실상 타인을 나로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사랑이 식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되고, 그의 생은 나의 생과 맞닿는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식은 게 아니라 하나였던 우리가 다시 둘로 나뉘었을 뿐이다.
우정이든 연애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사랑은 등급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결국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상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화를 내는 건 간섭이 아니라 보호이고, 무너졌을 때 함께 주저앉는 건 동정이 아니라 연대다. 이런 사랑엔 가격표가 붙지 않는다. 또한 무언가 특별한 사건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사랑의 문턱에 서 있게 된다. 그 문턱을 넘는 일은 경계를 잃는 일이고, 경계를 잃는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되어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서로를 타인으로 두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