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의 응시
흔히 우리가 불행이라 느끼는 순간들은 결핍을 제대로 직시하기 시작한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워진 감각은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되찾아야겠다는 욕망을 부르기 이전에 먼저 불행으로 다가온다. 통증은 한번 느끼기 시작하면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어지기에, 나의 아픔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가늠하는 것조차 고통이다.
결핍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을 더 욕망한다. 사랑이 모자라다고 느낀 사람은 사랑에 예민해지고, 버려짐을 겪은 사람은 관계의 기류를 불안할 만큼 빠르게 감지한다. 가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아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 생존의 본능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이처럼 결핍은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사람을 같은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그럴수록 불행처럼 느껴지면서, 스스로가 왜 이렇게 예민한지, 왜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을 오해한다.
이 불행이라는 것들은 늘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예상할 수도 없고, 예상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폭풍처럼 쓸어버리고, 그러다 결국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땅 속 깊은 곳에 몰아넣는 느낌이다. 인간이 나약하다고? 아니, 신도 인간이 되어 떨어지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버티다 끝에 가서는 세상은 불공평하고, 신은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아,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공평하다고 믿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나를 다독이는 말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더 많이 가진 타인뿐이고,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누군가는 많지 않아도 행복을 느끼는데, 왜 나는 가진 것보다 잃은 것들에 더 오래 시들리는지. 비뚤어진 열등감일까. 삶의 출발선이 다른 것도 전생의 업이라던데, 모난 성격까지도 그 탓일까.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인간은 공평보다 불공평 속에서 더 쉽게 희망을 찾는다. 누군가가 내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가 내 위에 있다는 사실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희망을 남기기 때문이다.
나의 불행은 싫다. 하지만 타인의 불행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불행의 서사는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고, 마치 중독처럼 계속해서 그러한 것들만을 찾게 만든다. 아마 그 안에 우리의 결핍이 너무 적나라하게 비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불행의 장면들은 결국 결핍의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거울을 들여다볼 때에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가 나를 보고 있음에도 저게 과연 정말 나일까, 남들이 보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를 먼저 떠올리는 인간은 정작 자신의 결핍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만 타인의 막다른 순간에 매달려, 스스로는 외면했던 감정을 남의 이야기를 통해 편하게 확인하려 한다. 잃어버린 무엇, 혹은 애초에 가져보지 못한 무엇을.
결핍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공허해진다. 우리 모두가 고독을 느끼는데도 그 고독을 결핍이라 부르지 못해 더욱 공허해진다. 모두가 결핍을 가지고 있으면서, 결핍을 가진 사람들을 병이라 인식하고 불쌍히 여기니, 결핍이 없는 척을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나는 이러한 결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늘 공허하다. 인정하지 않기 위해 외면하니 더 공허하다. 하지만 사실 모두가 그러한 공허함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불행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것을 자꾸 모자란 것 취급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쁘다 생각하는데, 사실 결핍은 나쁘지 않다. 결핍은 욕망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든다. 흔히 무언가를 가지기를 욕망하는 것은 나쁘고,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성자처럼 그저 많이 베푸는 것이 덕이요, 재물을 탐하는 자는 악이라 배웠다. 하지만 욕망이 없다면 삶은 변하지 않는다. 충만함은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결핍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기 때문이다. 재물, 배움, 인정. 모두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 것을 채우려 남의 것을 빼앗아 얻는 건 탐욕이지,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게 어째서 욕망이란 말인가. 성장은 충만에서 오지 않는다. 언제나 결핍에서 시작된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는 것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먼저 내가 가진 결핍부터 제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갈지, 어떤 세계로 나아갈지. 그리고 그 움직임이야말로 내 삶을 이전까지와는 다른 색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더는 결핍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 더 두렵다. 불행이라 부르는 감정도 그 결핍을 피하지 말고 더 깊이 들여다보라는 신호다. 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하는지,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원하는지,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신호 말이다.
깨진 컵이 두려움이 될 수 있을까. 깨진 컵은 그냥 깨진 컵일 뿐이다. 결핍도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균열에 불과하다. 그릇이 깨졌다면, 깨진 그릇과 더불어 새로운 그릇을 들이게 되면서 그릇이 더 커질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애초에 깨진 이유도 내가 이 그릇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담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릇이 깨진 것만 보고 마음 아파하기만 하기에 불행이라 느끼는 것이다. 때문에 행복할 순간이 찾아와도 행복이라 느끼지도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인식한 것만큼만 도달한다. 문제는 깨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깨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