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은 나의
우리는 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하루를 넘기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설렘이나 예고 없이 파고드는 기쁨을 삶의 전부라 착각한다. 꿈이라는 것이 그렇다. 꿈이라는 게 무엇일까. 심장이 뛰는 무언가를 마주쳤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불렀다. 그 두근거림을 품은 채 계속 걸어가면 언젠가는 나답게 살게 되리라 믿었다. 분명 나를 깨운 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설렘이란 감정은 지속성이 없다. 언제까지고 처음의 온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살아 있다. 모두가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감각이 둔해질 때마다 새로운 꿈을 만들고, 잠깐의 열정이 식으면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고 쉽게 단정한다.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나약한 것도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변화들은 꿈의 본질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뜨거울 때만 꿈이 유지된다면 그건 삶의 한 장면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강렬하게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어쩐지 계속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나에게는 꼭 있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꿈이라 이름 붙이지도 않았건만, 그래서 꿈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인데, 목적도 없이,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이어가게 된다. 아, 알았다. 여태 내가 알고 있던 꿈은 꿈이 아니었구나. 이루지 못한 것이 꿈이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꿈이었구나.
현실을 살아라. 그러나 무엇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세계가 전부였고, 깨어난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자리도 어쩌면 죽음 이후의 나에게는 또 다른 꿈의 일부일지 모른다. 그렇다며 내가 선 이곳은 어디인가.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세상조차 누군가의 상상과 선택이 쌓여 만들어낸 흔적에 불과한데, 정작 우리는 가장 먼저 상상부터 부정한다. 만약 모두가 현실만을 바라보았다면 이 세계는 여기까지 확장되지 못했을 것이다. 경계 밖으로 걸어 나가려 한 이들이 시대를 열었고, 그들이 남긴 길 위에서 현실주의자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상상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움직일 의향이 없는 이들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꿈을 꾸는 사람을 불편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고 있다. 그 팽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다면 그 정지야말로 가장 슬픈 일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눈앞에서 지워지고, 하나의 현실만을 사실이라고 믿는 순간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의 예고가 아니라,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의 조각이 밤의 틈을 통해 잠시 되살아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꿈에서 마주친 것들은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세계의 조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가본 적 없는 장소, 만난 적 없는 사람, 본 적 없는 풍경. 사람들은 그걸 상상이라 읽지만 나는 그것을 내 기억의 일부 또는 다른 차원의 잔상이거나 우주적 회상이라고 본다. 즉, 상상이란 사실 창조라기보다 회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인간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말은 오만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 있는 것을, 누군가 경험한 것을, 그래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지 기억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의 실재는 망설임 없이 믿으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실의 가능성은 끝까지 의심한다. 꿈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만들어낸 기억이 나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로 나아간다기보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성질을 지닌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꿈도 예외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나의 재능은 어느 정도인지 굳이 저울질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미 가진 것을 붙들고 값어치를 따지는 일보다 덧없는 집착도 없을 것이다. 재능의 척도 또한 그러하다. 세상에는 애매한 재능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형태만 있을 뿐이다. 빠르게 떠오르는 사람들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지만 급하게 타오른 만큼 금방 마모되고, 스스로도 그 열을 견디지 못해 쉽게 꺼져버리곤 한다. 반대로 느리게 쌓인 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축적되다 어느 순간 형태를 갖추고, 한번 자리를 잡으면 웬만한 충격으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불균형이라 부르는 모든 것 역시 우리의 짧은 수명과 인간의 좁은 시야가 만들어낸 착시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먼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은 제 흐름대로 이어져 있고, 늦게 드러나는 능력 또한 그 긴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오는 중일 것이다. 인과란 즉각적인 보답의 법칙이 아니다. 어떤 힘은 오래 돌고 돌아 늦게 발현되며, 어떤 가능성은 미세한 조건들이 맞물릴 때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재능 없는 사람들은 없다. 재능은 하고자 마음먹은 순간부터 만들어가는 것이다. 만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뿌리가 더 깊이 내려갈 시간을 허락받은 셈이니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꿈을 목적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냥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묻기로 했다. 그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유도 없다. 그냥, 정말 '그냥'이라는 말밖에 붙일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단어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와 차마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모든 의미가 뒤섞여 있다. 굳이 언어를 더 얹을 필요는 없다. 느껴지는 것이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주어지는 순간 꿈은 빠르게 좁아지고, 너무 쉽게 낡아버린다. 꿈을 설명하기 위해 붙여놓은 이유들은 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함께 무너진다. 이유로 지어진 꿈은 조건이기에 그 조건이 사라지면 꿈도 사라지는 것이다.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나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유들이 사라졌다고 하여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이 꿈 역시 이유로 붙잡히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이미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 다만 보지 못하거나, 알고도 모르는 척 지나칠 뿐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고, 지우려 할수록 더 또렷해지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꿈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일상적이고, 직업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내밀하여 오랫동안 이름 없이 존재해 왔다. 세상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깨우는 일은 많다. 하지만 그것과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은 다르다. 차이는 바깥과 안에 있다. 쾌락은 나의 외부에 있으나, 나는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만 외부에서 답을 찾으려 하니 끊임없이 방황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꿈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이전에 그저 살아가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 오래 머물던 습관. 애쓰지 않아도 내게 되돌아오는 것.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순한 모든 것들.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기 위해 나의 조각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른다. 이 모든 것들은 다시 돌아가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꿈의 본질은, 귀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