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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y Aug 23. 2020

행복의 끝을 찾아서 II

조기유학의 시작. 누구를 위한 선택인가

2001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에 신이 나있었다. 아버지께서 공항에 데려다주시면서 아프지 말고 가서 건강히 잘 지내다 오라고 말해주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아버지 없이도 나 혼자 완전 잘 살 수 있다며 의기양양되던 철부지였는데 막상 갈 때가 되니 부모님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던 것 같다. 면세점에서 함께 살게 될 홈스테이 캐네디언 가족들에게 줄 선물도 사고 처음으로 엄마가 아기자기한 향수도 사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9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하였다.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고 마중 나온 아버지 친구분 가족들께 인사하고 우리는 Langley (랭리 또는 랭글리)라는 도시로 갔다. 아버지 친구분 네 집은 영화에서만 나올 법한 저택들이 모여있는 동네에 살고 계셨다. 집이 어찌나 큰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캐나다에 사는 사람들은 다 이런 집에 사는구나 싶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바로 학교에 가는 건 시차 적응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시고 엄마와 나를 위해 록키 산맥과 빅토리아 여행을 예약해주셨다고 하셨다. 아버지 덕분에 두 번째 해외여행을 엄마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엄마에게 있어서도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도 그 이후에 그렇게 비행기를 자주 타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하셨을 것 같다.


캐나다 서부여행은 나에게 있어 강원도와 별다르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대형 관광버스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백인 기사 아저씨와 패키지여행에 같이 동행했던 일본 국적의 M언니만 우리 차량에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내가 패키지여행을 비선호하는 이유가 그때의 경험 때문 일 수도 있는 것 같다. 한국 아줌마, 아저씨들이 우와우와 하며 감탄하는 동안 나는 일본 M 언니에게 나의 일본어 실력을 뽐내는 편이 좋았고 버스 창가에서 보는 자연의 웅장함에 모든 사람들이 사진 찍기 바빴지만 나는 버스가 휴게소를 들릴 때 운전기사 아저씨와 사진 찍기 바빴다.

시차적 응이 안돼서 잠이 쏟아지는 나를 엄마는 계속 깨우며 “저기 좀 봐, 멋지지 않니?”, “돈 아깝게 계속 잠만 잘 거야?” 라며 타박했지만 할머니네 시골집 가는 길에 항상 보는 눈 덮인 산과 살얼음이 낀 호수를 왜 자꾸 보라는 건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거면 엄마만 여행 보내주고 나는 학교나 빨리 가서 친구들이나 사귀게 해 주지 라며 매일을 엄마에게 투덜만 대다가 빅토리아 여행을 마지막으로 긴 여행의 여정이 끝이 났다.


캐나다 학교는 어떨까? 어릴 적 보던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을까? '해리포터' 소설에 나오는 호그와트 같은 곳일까?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학교를 가게 되었다. 나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숲 속에 건물이 덩그러니 놓인 곳이 내 학교란다. 이제부터 나는 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고 한다. 오 마이 갓. 왜 아버지 친구분 딸인 S가 나에게 자동차 공장 같은 건물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아버지 친구분 네 댁에서는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주말에만 놀러 가기로 하고 나는 교육청에서 지정해 준 학교 근처에서 캐네디언 홈스테이 (하숙)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나 S네 집은 정말 부자 동네였는지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은 매우 아담한 집이었다. 그래도 뒷마당이 얼마나 넓은지 집에서 대형견 Jake와 고양이 Bell을 키우고 있었다.

엄마도 너무 놀랬는지 영어만 1년 동안 열심히 배우다가 아니다 싶으면 한국으로 돌아오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 부모님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 아줌마와 아저씨는 정년퇴직 후 소일거리를 하며 홈스테이를 하시는 것이라 하셨고, 자녀들은 모두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다며 아래층 방과 작은 거실 그리고 화장실은 나 혼자서 쓰면 되고 식사 때는 2층에 와서 하면 된다고 하였다. 엄마와 짐을 정리하고 동네 주변을 거닐었다. 10분 정도 걷다 보니 작은 슈퍼도 있고 맥도널드랑 여러 상점들이 모여 있었다.
“혼자 집에서 컴퓨터만 하지 말고 밖에도 좀 걸어 다니고 그래”
“응, 알았어”
내심 엄마도 이 먼 곳에 나를 혼자 두고 한국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엄마랑 다시 한국 가서 살 걸 그랬나 싶다.


만 열여섯.

어리다고 하기엔 옳고 그름을 알고 많다고 하기엔 미성숙한 나이.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부모님 품을 떠나서 살겠다고 결정한 것일까? 그리고 스무 해가 된 지금, 부모님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내셨을까? 하루하루 어떤 마음으로 지내셨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자 버텨냈던 것 같다. 내가 포기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실망하실까 봐, 혹시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지는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 견디고 또 견뎌냈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의 행복을 간절히 바랬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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