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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Sep 24. 2016

마드리드의 무지개퍼레이드

  7월 한 여름의 스페인은 뜨거웠다. 샤워를 하고 나와 어떤 유적지 앞도 아닌 마드리드의 어느 한 길가에서 섰다. 기분 좋게 건조한 햇살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히 햇살이 나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은 내 인생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숙소가 있는 Alonzo Martineze 역에 도착했다. 출구를 찾아 나오자마자 누군가 Liber Tango를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감격웠다. 마치 온 우주가 내가 스페인에 온 것을 환영해주는 느낌? 어떤 유명인사의 의전도 부럽지 않았다. 탱고 연주 소리를 레드카펫 삼아 한걸음, 한걸음 숙소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캐리어는 무거울 지라도 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마드리드의 어느 길가-나무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아름다웠다

  그 날 마드리드에서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이었다. 취업준비와 논문으로 받았던 스트레스로부터 잠시 해방되어 거짓말처럼 떠나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생각으로 약간 무리하며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도 없고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혼자 있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났을 정도였다. 한국에 지난한 현실이 남아 있으면 어떠리. 인생에 한 순간이라도 지금, 자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숙소에 대충 짐을 풀러 놓고 너무 배가 고파 당장 번화가 쪽으로 걸었다. 낯설었지만 두렵지 않았고, 혼자였지만 외롭지도 않았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마드리드의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타고난 길치인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 길을 잃었지만 역시 하나도 불쾌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몇 번 같은 길을 돌아도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 시간은 많았고 목적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길을 헤매면 헤매는 대로 또 주변을 둘러보고 새로운 풍경을 만나면 되는 것이었다. 

레인보우색 컵케익이 진열돼 있다.

  그렇게 정신 줄을 놓고 거리를 스캔하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무지개, 레인보우색이었다. 컵케익도 레인보우, 속옷가게의 속옷도 레인보우였다. 상점뿐 아니라 사람들도 유별났다. 상의를 훌러덩 벗어던진 근육질의 외국 남자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것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엉덩이, 가슴을 가느다란 실오라기로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거리에서 모델 워킹을 하고 있었다. 솔 광장을 지나 큰길에 도달해서야 나는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마드리드 퀴어퍼레이드 날이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하던 나는 발길이 묶여버렸다. 8차선쯤 되어 보이는 큰길은 퍼레이드에 참석한 군중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웃옷을 벗어던진 사람들은 서로 물을 뿌리고 북을 울리며 한껏 축제를 벌였다. 

  한국의 홍대 거리에서도 퀴어퍼레이드가 매해 규모를 키우며 진행된 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참여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첫 퀴어퍼레이드를 마드리드에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거리에 나온 탓에 자극적인 옷차림의 인파 속에 나는 정숙한 동양 여자 1인이었다. 하지만 이내 여기저기서 물을 맞아 내 옷도 시스루가 되어버렸다. 듣던 대로 정말 운동을 열심히 한 것 같은 근육질의 유럽 게이들이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성애자인 나는 좀 슬프기도 했다.

  군중은 정말 큰길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스페인에만 이렇게 퀴어퍼레이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꼭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인 것처럼 많았다. 모두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종교 세력의 반대나 혐오발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대포를 시원하게 맞으며 환한 웃음으로, 온몸으로 이 행진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커밍아웃에 대한 두려움에 가면을 쓰고, 축제라기보다는 아직까지는 인정투쟁에 가까운 우리의 현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

    마침 도착한 날이 퀴어퍼레이드라는 그 우연이 참 좋았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여성학 전공자로서 논문을 쓰면서 지칠 때도 많았다. 성별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다루면서 세상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고민의 끝에 만난 새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에 의해 편견과 차별, 공격을 받지 않을 자유를 외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다양성을 상징하는 레인보우를 내걸고 말이다. 거리 곳곳에 펼쳐진 무지개가 내게도 꼭 약속처럼 느껴졌다. 오랜 비가 결국은 멈출 것이라는, 그리고 사랑과 자유가 피어날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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