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를 떠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른 아침 기차에 몸을 실었다. 로마는 그리스와 함께 서양문명의 발상지로 꼽힌다. 교과서에서만 지루하게 되뇌었던 ‘서양문명의 발상지’를 직접 볼 생각을 하니 설렜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라기보다 ‘로마’ 그 자체로 방문할 만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과거 도시국가 시절, 한 도시가 하나의 국가와도 같았던 그때를 떠올리며 로마를 찾았다.
로마에서 고심한 것 중 하나는 숙소였다. 호스텔, 한인민박, 호텔을 섞어 숙소를 정하면서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저렴한 비용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 속에 혼자서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배치할 것, 여행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과 현지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적절히 섞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전 여행지에서 연달아 짧은 기간 한인민박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좀 여유 있게 현지인들의 생활에 밀접한 곳에서 머물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지코모 아저씨의 집이었다. 지코모 아저씨의 집은 인터넷에서 로마 숙소를 검색하던 중에 알게 된 곳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저렴한 가격에 혼자 방을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호스텔과 민박을 전전하다 보면 혼자만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애타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곳은 에어비앤비와 호스텔의 중간 정도 되는 개념이었다. 로마 중앙역인 떼르미니역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 떨어진 지역의 아파트에 혼자 사는 지코모 아저씨는 남는 방 세 개를 아기자기하게 꾸며 로마 여행자들의 숙소로 운영하고 있었다. 평범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에 머물면서 현지인인 지코모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현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짧은 시간 동안 한 나라에 대한 인상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여행자의 숙명적인 한계를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지코모 아저씨는 그런 의미에서 여행자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현지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미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입증하듯 정말 친절할 뿐 아니라, 본인 역시 여행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데서 행복을 느끼는 분이었다. 지코모 아저씨 덕분에 로마에서 보낸 시간은 더 따뜻하고 풍요롭게 기억되고 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내 평생소원인데 이곳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어 너무 행복했다.
로마에 도착한 첫날엔 몸이 좋지 않았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많이 지쳤는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늑한 방에서 홀로 쉴 수 있으니 위안이 되었다. 평소에 빨간색을 좋아하는 내 맘을 읽기라도 한 듯이 침대커버와 전등까지 예쁜 빨강으로 장식된 사랑스러운 방이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하루하루를 아까워하며 스파르타로 달려오던 일정에 잠시 쉼표를 그려놓고 몇 주만에 푹 낮잠을 잤다.
따뜻한 컵라면 한 그릇을 보양식 삼아 먹고 슬슬 걸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온 김에 떼르미니역으로 가서 로마 시내 한 바퀴를 도는 버스를 탔다. 무리하지 않고 그냥 동네 한 바퀴 돌 듯 로마를 돌아볼 가벼운 마음이었다. 운행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마지막 버스였다. 아픈 몸을 추스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로마의 주요 유적을 돌아보니 내가 로마에 왔다는 실감이 나면서 기분이 참 좋았다. 한 블록을 지나면 콜로세움이 있고, 또 한 블록 지나면 엄청난 고대 유적지가 차례로 늘어서는 것을 보면서 사진 찍을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감격에 휩싸였다. 그것들은 그저 흔한 관광지의 건축물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책과 영화에서, 아주 옛날부터 지겹도록 듣고 배워왔던 그것들이 실제로 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잠시나마 이 버스와 자동차가 달리는 현대의 차도를 지우고 고대, 중세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걷고 말하고, 늘어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 상상은 내일부터 이어질 로마여행에서도 내내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