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습기와 끈적함은 온 데 간데없고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침 기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아파트를 개조한 한인민박집도 호텔같이 안락했다. 언젠가부터 피렌체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티본스테이크와 프라다아웃렛의 도시로 각인되어 버린 것 같다. 나도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에게 몇 개의 스테이크집과 아웃렛 방문 팁을 추천받았다. 그런 이유로 피렌체에 도착하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첫날 두꺼운 스테이크를 먹고, 이튿날 프라다 몰에 가서 가방을 두 개나 삼으로써 미션 컴플릿!! 하며 뿌듯해했지만 로마에 도착하고 나서야 멋쩍은 후회가 몰려왔다. 르네상스의 발상지를 가방과 스테이크로 대신한 것은 아닌지.... 다음번에 꼭 피렌체를 다시 찾아 그 아쉬움을 달래리라는 약속을 하며 피렌체에서 보낸 이틀을 되새겨 본다.
도착 첫날, 여기까지 온 이상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우피치 미술관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파리에서 수많은 미술작품에 지쳐 있던 나는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메두사의 머리 정도?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미술의 세계 최대 보고로 손꼽히는 미술관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작품을 비롯해 고대 조각품과 13~18세기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배경지식의 부재와 시간 관계상 이들의 작품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미리 알았다면 우피치 미술관도 좋지만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가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우피치 미술관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로마에 도착해 미켈란젤로의 삶과 조각에 대한 열정을 알고서야 피렌체에 다녀가면서도 다비드상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비드 상은 517cm, 즉 5미터가 넘는 엄청난 크기의 조각상으로 피에타 상과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역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유럽에서 수많은 조각상을 봤지만 5m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조각상을 보기는 쉽지 않은데 스테이크 먹는다고 놓친 내가 미웠다.
그래도 ‘지붕 없는 미술관’ 답게 피렌체는 길거리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처럼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가득했다. 첫날밤 피렌체의 펍에서 술을 한잔 하고 거리를 누비다 조각상을 마주했을 때 느낀 벅찬 감동은 피렌체가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약간 신성한 느낌도 들고 내가 어디에 와있나 착각이 들만큼 몽환적이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예술가들은 신이 전부였던 시대를 마무리하며 다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만끽하는 르네상스의 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취해서 기억을 못 할 뿐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다비드 상의 복제품이라도 본 것이기를 소망해 본다.
피렌체에 도착한 첫날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유럽여행 중 이렇게 비가 많이 온 날은 처음이었다. 몸이 으스스 춥고 바람에 우산도 제대로 쓸 수 없어 담벼락에 숨어 비가 젖어들기를 기다렸다. 쨍하게 화창한 날씨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비에 촉촉이 젖은 두오모를 바라보니 피렌체만큼은 비 내리는 날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다음날 날이 맑게 개었다. 영화 <열정과 냉정 사이>를 보며 꼭 가보리라 생각했던 두오모를 오르기로 했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저질체력이 원망스러웠다. 463계의 좁다란 계단을 올라 드디어 두오모 쿠포라의 전망대에 올랐건만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두오모에서는 두오모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오모를 포함한 피렌체의 전경을 보려면 그 맞은편에 있는 지오토의 종탑으로 올라야 했다. 두오모의 쿠폴라가 중앙에 떡하니 펼쳐진 광경을 보기 위해 400여 개의 계단을 올랐건만... 아무 생각 없이 두오모에 오른 내가 바보 같았다. 결정해야 했다. 종탑을 또 오를 것인가. 뭔가 어제 과음으로 굉장히 무리한 상태였으나 반드시 영화 속 그 풍경을 내 눈으로 보리라는 일념으로 다시 계단을 내려와 종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다리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세계 최대 석조 건물인 쿠폴라 돔에 그려진 멋진 프레스코화와 성당 내부를 보았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다시 영차영차 종탑을 올라.. 수많은 사람들의 인스타와 블로그, 영화에서 이미 수타게 보았던 그 전망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붉은색 지붕과 흰 벽이 어우러진 피렌체의 시내가 정말 아름다웠다. 환한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두 곳에 모두 오르느라 다소 무리를 하였으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잠깐의 휴식 후 야경을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낮에 무리한 탓에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오르는 언덕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졸음 끝에 도착한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들어온 풍경 속에 꼭 르네상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불빛이 밝혀져 있는 몇몇 건물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했다. 피렌체, 이탈리아에서 가장 분위기 있는 곳이라고 감히 선정하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어쨌든 피렌체에서의 이틀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이었다. 부지런히 우피치 미술관도 가고, 두오모도 가고 밤에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 야경도 감상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여유 있는 시간을 갖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한번 피렌체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스테이크와 명품쇼핑은 잠시 제쳐두겠다고 다짐해본다. 피렌체를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쇼핑과 먹거리보다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잔잔한 배경음악을 들으며 르네상스의 정수를 만끽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