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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Sep 25. 2016

존 레넌 벽에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프라하에 단 이틀만 배정한 것이었다. 누가 프라하가  이틀이면 다 본다 했던가..... 나는 까를교와 프라하성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프라하에서의 이틀을 다 보내버렸다. 하벨 시장에서 아기자기한 프라하의 수공예 기념품을 구경하 재즈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에 인형극도 보고, 뜨르들로 한입 베어 물고 어슬렁거리다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러시아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기 전 프라하에서 주어진 마지막 오전. 까를교를 건너 맞은편에 위치한 존 레넌 벽에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른 아침 찬 바람을 맞으며 빠른 걸음으로 카를교를 건넜다. 야경이 아름다운 이곳을 아침에 거니는 느낌이 색달랐다. 동화에나 등장할 법한 중세의 성 같은 프라하 성을 등진 채 존 레넌 벽을 찾기 위해 열심히 가이드북을 뒤졌다. 프하라 성을 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존 레넌 벽에 더 가고 싶었다. (물론 프라하 성을 볼 시간적 여유도 되지 않았지만) 영국도 아니고 프라하에 존 레넌 벽이 있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비틀스의 엄청난 팬이고 그중에서도 존 레넌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영국을 가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얼마 걷지 않아 존 레넌 벽에 도착했다.

프라하의 아침, 야경만큼이나 멋진 아침의 풍경

  시간이 시간인지라 벽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벽뿐이었다. 대부분의 관광지로 알려진 벽들이 그러하듯이 존 레넌 벽 역시 평범한 담벼락이었다. 그 위에 존 레넌의 얼굴과 색색깔의 그라피티가 덮여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행의 마지막 아무도 없는 존 레넌 벽 앞에 차가운 공기에 둘러싸인 채 홀로 서서 나는 가만히 나의 내일을 생각했다. 존 레넌의 <Imagine>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천국도 지옥도 없이 모든 사람이 현재를 살고, 나라 종교도 없이 모두가 평화로운, 욕심도 굶주림도 없이 함께 나누며 사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본다. 가끔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자인 내가 답답하고, 좌절감 느낀다. 그럴 때면 ‘너는 나를 몽상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 am not the only one)라'는 존 레넌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곤 했다.

프라하에 있는 존 레논 벽 "WAR IS OVER"

 

존 레논 벽 근처에 있는 존 레논 펍

  차가운 철의 장막도 프라하의 젊은이들의 열정과 공감대는 막지 못했다. 그들은 잘못 잡힌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서방세계의 음악들에 귀를 기울였 사랑과 평화, 이상을 이야기하던 음악들에 공감했다. 그러던 중 1980년 광팬의 총에 맞아 존 레넌이 숨지 그를 추모하기 위한 글이 소소하게 모인 것이 지금의 존 레넌 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벽은 단순한 추모의 벽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유와 사랑, 평화를 희망했지만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체코의 젊은이들이,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열망, 현 체제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쏟아내는 장이었던 것이다. 화려한 색감만큼이나 다채로왔을 그들의 꿈과 희망, 상상들이 널리 발휘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힘들게 논문을 쓰고 부리나케 달려온 유럽여행. 온전히 혼자가 된 듯한 자유와 담대함을 느끼기도 했고, 때로는 쓸쓸하고 낯선 순간들도 있었다. 나의 20대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철없이 놀기도 하고 순수한 사랑도 했다. 직장에 들어갔다가 공부를 하겠다고 나와 읽은 책들, 세상에 대한 고민들. 그런 모든 시간들이 지나고 나는 다시 원점에 서 있다. 세상에 선한 것들을 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배우고 쌓아가는 시간을 가지기로 다짐했다.

  이제 그 시간들도 끝나간다. 인생이라는 책의 한 장을 넘기고 새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다시 세상에 부딪쳐야 할 때가 온 것일까. 신이 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 만도 않다. 사상 최대의 취업난이라는 우리나라의 현실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선뜻 힘이 나지 않는다. 또다시 얼마나 머나먼 길을 가야 할까. 그렇게 발버둥 친 끝에도 원하는 것들을 찾지 못한다면, 아니면 내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을까. 여행 중 만난 수많은 인물들처럼 때로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며 두려움에 맞설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들이 스쳐간다.

  이번 여행이 모두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을 통해서 보았던 더 넓은 세상, 용기 있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 인류가 만들어온 아름다움과 기적, 때로는 깊게 파인 상처와 아픔들을 어루만지듯 걸어온 이 길이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들에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앨범처럼 닳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나를 응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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