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는 아픔이 많은 나라다. 407년을 독일어권 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40여 년을 소련의 지배하게 놓였다. 1520년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400년 가까운 시간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체코 왕이자 프라하성의 주인 역시 체코 사람이 아닌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던 시절이었다. 이후 1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며 1918년 10월 28일 체코는 독립하며 슬로바키아와 연합해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7년의 독일 지배기간 동안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처럼 체코에도 테레진 수용소라는 곳이 세워졌다. 극심한 박해와 억압을 견뎌야 했다. 1945년 5월 8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독일의 지배 역시 끝났으나 이후 1989년까지 40년 동안 소련의 관리국이었다. 소련 체제 하에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프라하의 ‘팁 투어’ 덕분이었다. 급하게 떠난 여행. ‘팁 투어’를 하지 않았다면 그저 체코를 맛있는 맥주와 멋진 야경의 도시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비용도 의무도 없이 자유롭게 모여, 자유롭게 듣고 자신이 느끼고 배운 만큼 성의를 표시해 달라는 자신감 넘치는 투어. 어떤 상업적 질서에도 기대지 않은 이들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투어였다. 프라하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2011년 5월부터 ‘RuExp’라는 팀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팁 투어는 사전 신청이나 예약 없이 그냥 정해진 장소로, 정해진 시간에 가면 된다. 매일 늘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는 팁 투어는 한 명이 와도, 백 명이 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중간에 이탈하는 것도 끝까지 듣는 것도 참가하는 사람의 자유이며 투어의 말미에 내는 팁 역시 정해진 금액이 없다.
팁 투어는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에는 시민회관에서 시작해 estate극장, 프라하대학, 바츨라프 광장을 둘러보며 프라하의 근, 현대사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오후에는 프라하성을 중심으로 중세 체코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투어가 진행된다. 나는 짧은 일정으로 오전 투어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오랜 지배로 체코인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아픔. 격동의 세계질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해온 숭고한 정신을 만날 수 있었다. 카프카, 밀란 쿤데라, 드보르작, 스메타나 등 체코 사람들의 문화와 철학, 삶과 예술 역시 멋지게 설명해 주셨다. 가장 와 닿았던 것은 프라하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바츨라프 광장에 대한 설명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에 대한 가이드북의 소개는 간단하다. “가로, 세로 면적 그리고 쇼핑의 명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짧은 한마디 ‘프라하의 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가이드 님은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 그런 아픔과 고통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운 모습으로 화려한 쇼핑몰에 둘러싸인 바츨라프 광장은 수많은 프라하 시민이 모여 자유를 외쳤던 ‘프라하의 봄’의 배경이 된 곳이다. ‘프라하의 봄’을 단순히 소련에 지배에 저항한 프라하 시민들의 저항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가이드 선생님의 구체적인 설명에 이 곳을 찾고도 무지했던 숙연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대전 후 냉전체제에 돌입하면서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하에 체코를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주의는 오랜 지배기간 언론, 창작, 여행의 자유, 다수 정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적인 독재 정권에 불과했다. ‘우리가 원하던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며 ‘둡첵’은 소비에트 연방에 최초의 반기를 든다. 그러나 소련은 이런 반란을 군대의 무력으로 진압한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쳐들어오는 소련의 군대를 폭력을 쓰지 않고 돌아가게 만들어 보자는 믿음으로 모든 표지판에 화살표를 지우고 ‘freedom’이라는 글자를 적는다. 그렇게 총과 칼 대신 사람들은 한 송이 장미를 들고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탱크가 막아섰고, 이어진 수 천 번의 총성 끝에 76명이 죽고, 46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260명이 경상을 입는 비극이 발생했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은 웃통을 벗고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선 한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도한 미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 제목 ‘과연 프라하의 봄은 올 것인가?’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바츨라프 광장은 불법 침략에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맞서려 했던 선량한 시민들이 폭력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짓밟힌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상처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 이후로 두려움과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다. 총리였던 둡첵은 총리 자리를 내려놓고 슬로바키아에서 경비원이 되었고, 시민단체와 학생단체는 극심한 도청에 시달려야 했다. 실패를 맛본 국민들은 아무도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숨죽여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체코의 시민들은 다시 한번 일어서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저항한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까를 대학 철학과 학생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희생 끝에 결국 좌절과 무력감만 남은 현실을 개탄하며 다시 한번 체코인들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1주일에 1명씩 분신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무 큰 두려움과 좌절에 빠진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방법을 모색했던 것 같다. 죽음과 불에 타는 고통도 두렵지 않았던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1969년 1월 16일 21살의 얀 팔라흐가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했다. 일주일 뒤 동급생인 얀 자이츠가 뒤를 이었다. 이어지는 분신에 광장을 막아버리자 자신의 고향 앞에서 이브 셴이라는 학생의 세 번째 분신이 있었다. 철학과 10명의 학생은 분신을 이어가기로 약속했으나 4번째부터는 나오지 않았다.
첫 번째 주자 얀 팔라흐가 병원으로 옮겨지며 숨이 붙어있던 마지막 1분의 시간 왜 분신을 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이일을 벌인 이유는 소련 때문이 아니다. 프라하의 봄이 실패하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출근길 그의 기사를 읽은 프라하의 시민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불길은 쉽게 타오르지 않았다. 폭력으로 짓밟힌 좌절과 두려움, 무력감은 좀처럼 용기를 내기 어렵게 했다. 그 후로 20년 아무것도 믿지 않는 환멸의 시대가 이어졌다.
스탈린 사망 후 1987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개혁의 가치를 외치며 세상은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폴란드에서 전기 공장 노동자였던 바웬사가 공산당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으면서 동유럽 국가 중 최초로 민주화에 접어들게 된다. 바츨라ㅡ하벨 연극작가이자 인권 활동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은 1989년 대통령이 되면서 정점. 프라하의 시민들은 기다렸다는 듯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방패를 든 시위대에게 한송이 꽃을 쥔 손을 높이 들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프라하의 봄 20년 만에 그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부드러운 벨벳천과 같은 벨벳혁명이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투어를 듣고 있던 우리는 모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투어에 참여하고 있던 한 어머니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으셨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청년들, 탱크와 총소리에도 숨지 않았던 시민들, 정의와 자유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 오랜 시간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떠올랐다. 바츨라프 광장에 늘어선 쇼핑센터와 음식점만 둘러보고 돌아섰다면 어땠을까.
폭력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나선 인간의 숭고한 용기와 신념이 묻어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인도해준 것에 대한 대가를 돈 몇 푼으로 보답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대략적으로라도 정해진 금액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열심히 지식인을 검색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프라하의 시민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만나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팁’을 건넸다. 이들 역시 그 감사의 마음을 받았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자본의 논리로 점철되어버린 상업성에 눈살이 찌푸러질 때가 많다. 돈이면 다인가 싶어 씁쓸할 때도 많다. ‘팁 투어’.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 그런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희망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