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세상에서 아이 키우기
아이 키우기 어려워진 세상, 제발
아이 키우기 더욱 힘들어진다. 세상이 달라지고 육아도 변한다. 사람들은 "그래도 다 잘 자라. 때 되면 다 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조언에 반기를 든다.
'아이를 그래도 잘 자라게 해 주던' 놀이터와 골목이 사라졌다. 물론 놀이터와 골목은 아직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라졌다는 것은 '놀이하는 아이들'이다. 놀이터와 골목에서 하루 종일 노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밥 먹고 뛰어나가 놀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기관으로. 학원으로. 집으로. 그곳에서의 활동이 놀이터와 골목의 놀이를 대체할 수 있을까?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 놀이를 지지하고 퀄리티 높은 교사가 있는 기관은 아이에게 충분한 단체 놀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아이의 감각 발달을 지지하고 야외 놀이를 권장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아이는 하루 종일 실내에서 감각 발달이 차단된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놀이에 노출된다. 어린 나이부터 학습에 내몰리면 더욱 좋지 않다. 주도적 확장적 놀이 기회를 잃는다. 결과 전두엽 발달이 약해진다. 방과 후 충분히 놀 수 있으면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냥 그대로도 잘 자란다고 믿고 있다가, 나중에 치료실을 전전하게 된다. 사춘기 때 터져 고생하게 된다.
놀이하는 아이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웃의 도움이 사라졌다. 옛날에는 같은 동네 사는 엄마들이 서로 알고 지냈다. 아이들을 놀리며 부모들도 교류했다. 인정을 나누고 힘든 사람 도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공동육아는 기관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마저도 부모가 아닌 기관 안에서 아이들만 교류하는 수준이다. 이런 사회에서 엄마는 '독박' 육아를 한다. 독박 육아라는 말이 참 싫지만 그게 현실이다. 혼자 아이를 본다. 대체 어느 시대에 엄마 혼자 아이를 보았나?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이 필요한 법. 심한 학대가 많아지는 요즘 현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른들의 도움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힘들면 봐주고 같이 키웠다. 그런데 요즘은 제2의 인생을 사느라 다들 바쁘다. 우리가 이 세상이 처음인 만큼, 윗 세대에게도 이 세상은 처음이다. 생존하고 적응하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게 된다. 따라서 100세 시대는, 손자 손녀들이 알아서 잘 자라야 하는 시대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꼭 용돈을 쥐어드려야 한다. 애초에 아이는 못 봐준다고 못 박는 부모님들도 많으시다. 그러면서도 왜 결혼 안 하고 아이는 왜 안 낳느냐는 모순된 걱정이 돌아온다.
너무나 육아 정보가 많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고 할 것은 너무 많다. 육아 용품도 너무 많다. 육아는 거대한 하나의 산업이다. 엄마의 불안을 자극하며 쑥쑥 자란다. 예전 분유 회사들은 분유가 최고인 것처럼 마케팅을 했다. 요즘에서야 엄마의 모유가 좋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분유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유가 가능한 사람의 모성을 박탈하면서까지 그리해야 했는가. 돈에 눈이 먼 산부인과는, 조리원은 어떤가. 그런 일이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눈을 떠야 한다.
어린이집 보육비 지원이 시작되며 너도 나도 어린이집에 보냈다. 보내야 정부 지원금이 많이 지원되니, 안 보면 손해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부는 과연 엄마들을 위해 지원금을 쓴 걸까? 취업률을 올리고 기관이라는 하나의 산업을 육성시키며, 엄마들이 일하게 해 나라의 경쟁력을 올리려는 의도 아니었을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가정보육하는 엄마들에게도 같은 지원금을 주어야 맞다. 물론 기관은 중요하다. 맞벌이 부모에겐 필수다. 코로나로 기관에 보내지 못하니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았다. 아이들이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아 학대나 사고 같은 일들도 생겼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하루 종일 어린 아이를 보내는 일이 없지 않다. 또한 현재 많은 어린이집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선생님 대 아이들 수가 너무 많다. 공간이 좁고 야외활동이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이집 교사들은 정말 푼돈에 힘들게 일한다. 안타깝게도 모든 독을 받는 건 아이들이다. 이런 모든 일들에, 정책을 만든 정부는 책임을 질 것인가.
그럼 가정보육이 답인가? 같이 놀 수 있는 아이들이 사라지고, 함께하는 이웃이 사라진 현실에, 가정보육은 더더욱 쉽지 않다. 만약 한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일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당한다. 기관에 보내지 않는다고 이상한 엄마 취급하기도 한다.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있다. 예민한 기질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항상 해당되는 군이 없었다. 기관 적응도 힘들었다. 가정 보육도 힘들었다. 말도 안되는 훈계를 하는 엄마들과 어울리기도 어려웠다. 혼자 오롯이, 모든 독을 받아냈다. 이웃과 부모의 도움 부재를 육아서가 채웠다. 그런 나를 보며 또 열심히 아이를 키운다고, 유난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잘 자라니 이제야 모든 말이 쑥 들어갔다. 수많은 말을 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도움을 준 적 있는가? 왜 비판은 있고 도움은 없는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높여 외쳐야만 하는가.
제발. 육아, 이대로는 안된다. 엄마들 너무 힘들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야 할 소중한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움이 필요하다. 사회도 어른들도 또한 부모들도 자각하여 움직여야 한다. 비난할 시간이 있다면 단 한 시간이라도 아이 돌보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정부의 근시안적 탁상공론을 비판해야 한다. 정부가 힘이 없다면 육아에 고퀄리티 도움을 제공하는 사기업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이제는 놀이도 단체 활동도 치료처럼 접근해야 한다. 예전과는 다르다.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 하는 때다. 그리고 매일을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들을 제발 너그럽게 봐주길. 바로 그 엄마들이 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갈 선구자가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