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케이크 대신 홈메이드 당근수프

야매 당근수프 레시피

by 단풍

올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패스했다.

가뜩이나 2인 가구라서 케이크 한 판을 다 먹기 힘든데, 작년에 비해 케이크 가격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 둘 다 기독교는 아니지만 매년 재미 삼아 호텔 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곤 했는데, 올해는 경제 상황도 안 좋고 앞으로 1년간 바짝 돈을 모아야 하기에 케이크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대신 집밥으로라도 연말 외식 기분을 내고 싶어서 당근수프 만들기에 도전했다.


시어머님이 주신 샛노란 당근

많고 많은 수프 중에 왜 당근수프를 선택했냐면, 시어머님이 주신 당근이 냉장고 깊숙한 속에서 명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로 벌써 이 당근이 우리 집에 온 지 2주가 넘었다. 내가 당근을 별로 안 좋아하기에 요리할 때 자주 쓰지 않아서 이대로 두면 내년까지 이 당근이 냉장고 속에 있을 게 분명했다. 시어머님이 주신 소중한 당근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많은 양의 당근을, 최대한 빨리 소비할 수 있는 당근수프를 만들어보기로 한 거다.








� (야매) 홈메이드 당근수프 레시피
- 재료: 당근 (약 3개), 양파 (1개), 생크림, 치킨스톡, 버터, 소금, 올리브오일



1.

먼저 당근을 얄팍하게 썬다. 참고로 나는 작은 당근 3개, 큰 당근 1개 해서 총 4개를 잘라줬다. 당근이 작아서 그런지 4개를 잘랐는데도 냉면 그릇이 꽉 차지 않았다.


2.

당근에 올리브오일과 소금을 뿌려서 버무린다. 올리브오일은 피코크 오히블랑카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을 사용했다. 피코크 올리브오일을 처음 사봤는데 완전 가성비 있다. 가격이 저렴한데 맛도 나쁘지 않고, 올리브오일 종류도 다양하다. 앞으로 올리브오일은 이 녀석으로 정착할 예정이다. 왜냐 나는 가성비 요정이니까.



3.

올리브오일과 소금에 버무린 당근은 에어프라이어에 굽는다.


4.

우리 집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는 위아래 양면으로 요리가 되는 기종이기에 따로 뒤집지 않고 한 번에 구웠다. 170도 20분 굽고, 160도 10분 추가로 익혀줬다. 굳이 20분, 10분 끊여서 구워준 이유는 따로 없다. 그냥 에어프라이어를 한 번에 30분 이상 돌리면 뭔가 뜨거워서 불날 거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제품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이 그렇다.


그렇다. 나는 MBTI, N이다. 요리를 하면서도 이런 쓸데없는 상상 때문에 일을 사서 한다.


5.

30분 동안 에어프라이어로 구운 당근. 기름을 둘러 구웠더니 고구마처럼 달큼한 맛이 났다. 당근을 안 좋아하는 내가 먹어도 맛있었다. 앞으로 당근은 이렇게 구워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장을 보러 가면, 당근에 손이 안 가겠지.


나에게 당근이란, 건강한 식단으로 음식을 먹어볼까!라고 큰 다짐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식재료인 거 같다.


6.

당근이 에어프라이어에서 구워지는 동안 양파를 볶았다. 팬에 오일을 두르고 채 썬 양파 1개를 넣고 중불에서 볶다가 물을 살짝 넣어 익히다 보면 달달한 향이 나면서 갈색빛이 돈다. 티브이에서 자주 나오는 '카라멜라이징'이 바로 이것이다.


원래 좀 더 볶아야 하지만, 당근수프를 빨리 만들어서 먹어보고 싶은 궁금증 때문에 이쯤에서 그만뒀다. 참고로 나는 가끔 나의 이런 호기심과 조급증 때문에 일을 망치곤 한다. 그러나 다행히 당근수프는 맛있게 완성이 되었다.


7.

이제 구운 당근과 양파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야 하는데, 양파와 당근이 너무 뜨거워서 잠시 식혀줬다. 캠핑용 선풍기를 이용해 식혀줬는데, 우리 집에선 이 선풍기가 설거지 거리의 물기를 말리거나 요리할 때 더 많이 쓰인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캠핑을 하지 않는다.



8.

재료가 어느 정도 식어서 믹서기에 넣고, 물을 넣어줬다. 당근(작은 거 3개, 큰 거 1개)과 양파 1개 기준으로 300ml 정도 넣어줬다.


9.

재료를 다 넣으니 믹서기 용량이 꽉 찼다. '재수 없으면 갈다가 넘치겠는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말의 참뜻을 알게 된 사건이었다.


10.

참고로 이 믹서기는 남편이 자취할 때 구입한 테팔 믹서기이다. 자취용이기 때문에 용량이 적지만, 기능이 멀쩡해서 아직도 잘 쓰고 있다.




11.

넘칠까 봐 한 번에 위이잉하며 세게 갈지 않고, 천천히 챱챱챱 다져가며 당근과 양파를 갈았다. 다행히 넘치지 않았다.


다 갈린 당근과 양파는 단호박죽 색깔이 되었다. 색깔이 정말 곱다.



12.

양파를 볶았던 팬에 간 재료를 부어줬다. 되직하게 갈아진 탓인지 믹서리 안에서 내용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물을 넣고 흔들어 준 후에 팬에 부어버렸다.


대략 물을 50ml 정도 더 넣은 거 같다. 좀 묽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차피 한 번 끓여줄 거라, 끓일 때 수분을 많이 날려버리지 뭐, 싶어서 그냥 강행했다.


13.

간 재료에 맛을 더해줄 삼총사를 꺼냈다. 참고로 맨 오른쪽 통에 들어있는 건 소분한 버터이다. 이렇게 소분한 재료를 꺼내쓸 때마다 주부 9단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당근수프를 만들기 위해 유일하게 산 식재료가 휘핑크림이다. 원래 생크림을 넣어야 하는 거 같았지만, 동네마트에 생크림은 없고 휘핑크림만 있어서 냅다 집어왔다. 심지어 용량도 1L짜리 밖에 없어서 5천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 온 녀석이다. 고로 이 당근수프가 망하게 되면 5천 원을 그냥 땅에 버리게 되는 셈이다.



14.

치킨스톡 한 큰 술, 버터 2조각을 먼저 넣었다.



15.

생크림은 100ml 정도 넣었다.



16.

재료를 넣고 약불에서 천천히 끓이니 제법 호박죽 같은 비주얼이 나왔다.



17.

수프답게 좀 더 크리미 하면 좋을 거 같아서, 생크림을 150ml 정도 더 넣어줬다.


뭔가 비주얼이 예쁘다.


뭔가 성공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8.

생크림을 추가로 넣고 수프를 끓이는 동안, 남은 휘핑크림은 얼음틀에 넣고 얼렸다. 당근수프 만들기가 끝나고 나면, 이 휘핑크림은 냉장고 안에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버려질 운명이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얼려놓으면 언젠가 쓰이게 될 일이 있을 거 같아서, 그때까지 잠시 냉동실에 봉인해 두기로 했다.


근데 휘핑크림을 얼려서 보관해서 되는 건지, 팩트체크는 안 해봤다. 그냥 내 뇌피셜로 얼려서 보관하는 것일 뿐...


19.

휘핑크림이 1L라서 그런지 얼음틀에 넣고도 아직도 양이 많이 남아서 음료용 크림을 만들었다. 거품기가 없어서 손풍기로 만들었더니 손목이 좀 아려왔다.


사서고생이 이런 거 같다.



20.

음료용 크림이 너무 맛있게 만들어져서, 급 라테를 만들어 크림을 올려 마셨다. 당근수프로 외식 기분 내려다가 당이 떨어져서 안 마실 수 없었다.



21.

생크림, 아니 휘핑크림을 정리하는 동안 수프가 다 끓여져 통에 담아 소분했다. 당근을 4개나 썼는데 생각보다 양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집에 처치불가 당근이 많이 있을 때는 수프가 최고인 거 같다.



22.

내가 먹을 당근수프엔 파마산치즈를 뿌렸다.


22.

당근수프 위에 크루통을 올려 먹고 싶었지만, 집에 식빵이 하나도 없어서 양파튀김을 올렸다. 샐러드 위에 뿌려먹으려고 산 건데 여러 요리에 요긴하게 잘 쓰고 있다.



23.

노란색을 보면서 먹고 싶어서 일부러 투명한 컵에 수프를 담았는데 컵에 그려진 캐릭터 색깔하고도 딱 맞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24.

1시간 30분 만에 홈메이드 당근수프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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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메이드 (야매) 당근수프의 맛

집에서 정성 들여 만든 당근수프의 맛은, 놀랍게도 당근 맛이 별로 안 났다. 당근보다는 카라멜라이징 한 양파 맛이 더 많이 났다. 하지만 맛만 보고 평가하자면 레스토랑 뺨치는 고급진 수프맛이 났다. 설탕이 하나도 안 들어갔는데 재료 본연에서 나오는 단맛이 강해 저절로 입맛을 다시게 했다. 단호박이 아닌 당근에서 이렇게 고급스러운 은은한 단맛이 나오다니, 새로운 발견이다.


하지만 당근수프인데 당근 맛이 약한 건 여전히 아쉽다. 다음에 만들 때는 양파 양을 좀 더 줄여서 당근 맛을 더 키우고, 당근을 좀 더 구워서 입자가 좀 더 곱게 갈리도록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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