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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석사 Dec 17. 2020

'적당히'의 미학

“언니는 어떻게 대학원을 다니면서 육아를 해요?”


코로나로 인해 거의 1년 만에 만들어진 대학원 회식 자리에서 동기가 물었다. 대학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바빴고 2학기가 되어가니 지쳐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방학까지도 매주 진행된 특강 때문에 1년 내내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었고 다음 학기에는 휴학을 고려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 속 좋은 사람처럼 허허 웃으며 학교를 다니고 거기에 육아와 가사도 병행한다는 나라는 사람이 신기했던 건지 동기의 질문 속에는 궁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답이 따로 있을까. 굳이 답을 이야기한다면 ‘적당히’하고 있다는 것이 답인 것 같다. 육아도 완벽하지 않게 그냥 적당히, 학교 공부도 과제도 적당히. 완벽함은 이미 일전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생각해보면 나의 ‘적당히’의 시작은 직장생활을 하던 때부터였다. 보통의 사람들이 인생의 미션이라고 말하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낳고 보니 한 단계, 한 단계 미션을 깰수록 보상(?)으로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결혼을 하기 전이라면 ‘직장생활을 하는 나’라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을 결혼을 함으로써 ‘누군가의 아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고 아이를 낳고 나니 ‘한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혼자 살 때는 퇴근하고 씻자마자 바로 누워서 온종일 밖에서 쏟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으로 보냈다면 지금은 퇴근한 이후에 에너지를 충전할 겨를도 없이 엄마와 아내의 역할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나는 직장이건 가정이건 어느 면에서든 완벽한 슈퍼우먼이고 싶었지만 내가 슈퍼우먼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슈퍼우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었고 에너지의 수치가 100이라면 한 가지 일에 100이라는 에너지를 쏟는 사람과 달리 나는 직장과 가정에 에너지를 적당히 분배해야 했다. 어느 날은 직장생활 60, 가사에 20, 육아에 20.. 어떤 날은 직장생활에 20, 가사에 20, 육아에 60. 어쩌다 한 번은 100의 에너지를 쏟는 날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날을 이런 식으로 에너지를 나눈다. 즉, 모든 역할을 ‘적당히’ ‘완벽하지 않게’ 수행한다. 그 어떤 역할도 포기할 수 없는 역할이고 내 인생을 구성하는 한 부분들이므로 장거리 마라톤을 하듯 지치지 않도록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적당함을 공부에도 적용한다. ‘적당함’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보면 ‘애매함’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적당히’의 사전적인 의미는 ‘엇비슷하게 요령이 있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요령껏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어떠한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선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적당하게만 일을 처리하다 보면 애매해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적당히 할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나도 좋은 결과물을 얻고 싶었고 다른 동기들처럼 온전히 공부하고 작업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목표가 있고 꿈이 있어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만큼 애매하고 적당하게만 에너지를 쏟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으니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적당하게라도 모든 역할을 어떻게든 수행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나름 대견스럽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는 적당히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매일 매 순간을 100의 에너지를 채워서 살고 있으니까. 요즘 들어 세상을 애매하게 그리고 적당하게 사는 것조차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적당히 살기로 했다. 비록 한 가지에 에너지를 모두 채워 비범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치지 않게 꾸준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적당함의 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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