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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계절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돌고 돌고 흐르다 나도 멀리 저편에

by 미세스 박


나주로 발령받아 처음 버스를 탔을 때는 겨울이라 몹시도 추웠었다.


눈이 왔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버스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손과 발을 동동 굴렸던 것 같다.


꽃 피던 봄과 무더운 여름이 지나 어느덧 가을이 오고 있다.


나의 오랜 친구 우울과 공황은 나주 발령으로 더욱 심해졌다.


“볕이 든 날이 한 번도 없어. 가끔씩 그래도 반짝해서 그걸로 그 시간들을 견뎠는데, 어떻게 그 반짝 한 번이 없었는지.”


얼마 전 누군가에게 푸념 섞인 말을 했다.


나주에서는 매일 아침 기도로 시작한다. 새벽 요가와 저녁 공원 산책을 하며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되뇐다.


그만두고 싶지만 지금은 그만둘 수 없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마음속으로 떠올린다.


돈, 내가 고과를 깔아드려야 할 차장님, 매일 내 등을 보며 힘을 내고 있는 선미 언니, 나를 꼭 명퇴는 시켜야겠다는 은옥이 등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인생인데, 진짜 인생을 처음 마주하고는 겁쟁이처럼 돌아서는 건 아닌지 나 스스로 버텨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을 숨겨놓으니 다행스럽게도 요란하지 않게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내 생일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이들의 축하를 받았다.


조용하게 조촐하게 적당하게 보냈다.


이번 주 목요일 은옥이는 새벽에 미역국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고, 선미 언니는 금요일 미팅룸에서 케이크를 챙겨 와 노래를 불러주었다.


충분히 행복한 삶이고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공허하고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걸까?


”네가 예술가라서 그래. “


이건 무슨 당치도 않는 말이다.


나는 하늘을 보며 멍 때리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조금만 힘들면 잠으로 도망가버리고, 가끔 서투른 그림을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을 끄적일 뿐이다.


오늘 회사 버스를 기다리는데 해가 짧아졌다.


어둑함 속에 목을 빼고 회사 버스를 기다린다.


그래도 그 많은 버스들 틈에 저 멀리서도 우리 회사 버스를 잘 알아본다.


버스정류장에는 모두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처럼 순하게 앉아서 엄마를 기다리듯 자기 회사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면 모두 무표정한 얼굴이다. 이 또한 작은 위로가 된다.


“아 나만 가기 싫은 것이 아니구나. 나만 괴로운 게 아니었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내가 힘들 때 남도 힘든 것이 나름대로 위안이 된다.


내 마음속에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칠 때 해가 쨍하게 나서 행복하게 웃는 사람을 보면 왠지 나의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번 달에는 용기 내어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고, 필요하면 약도 먹을 생각이다.


우울도 전염이라는데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그만 지치게 하고 싶다.


인생이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것 같다.


이처럼 낮밤의 길이가 달라지며 그 흐름에 나도 따라 흘러가고, 이렇게 저렇게 몸부림치다 엎어졌다 다시 걸었다 하면서 그냥 엔딩이 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여느 때보다 고요했던 마흔여섯 번째 생일날을 나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마무리해 본다.


그래도 나주에 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방


’ 도착하자마자 아끼는 램프에 불 먼저 밝혀야지.‘


“차장님 오셨어요? ” 하고 활짝 웃어주는 숙영이가 있다.


힘들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만의 정들은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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