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돌팔이 글쟁이 시점 영화 vol. 2
영화 평론을 하겠다고 거창하게 ‘출사표’도 던졌으니, 본격적으로 내 얇고 작은 지식의 창고에서 그동안 보았던 영화 목록을 끄집어내야 했다.
오래된 창고라 그런지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 별다른 소득도 없었는데, 뉴스 한 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 조X웅 은퇴 선언.’
누구에게나 ‘참 좋아하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쉽게 얻어내던 이 유명 배우는,
최근 한 탐사 보도 매체를 통해 미성년 시절 행적을 둘러싼 보도가 나왔고, 그 여파로 은퇴를 선언했다는 소식이었다.
‘과거의 일’이라는 말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사건의 전모가 명확히 확인된 보도는 아니지만, 그 보도에 담긴 사건의 성격을 떠올리면 피해자의 삶에 어떻게 남아 있을지는 쉽게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방구석에 박혀 글이나 쓰는 글쟁이 하나가, 좋아하던 배우를 옹호하겠다고 함부로 나불대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유명 배우의 뉴스를 다시 한번 거론하는 이유는, 소년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과 평가, 판단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 《슬리퍼스(Sleepers)》라는 영화가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원작자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슬리퍼스 Sleepers (1996)
청소년 관람 불가 / 감독 배리 레빈슨
출연 : 브래드 피트, 로버트 드 니로, 더스틴 호프만, 케빈 베이컨
내 이마의 주름살만큼이나 오래된 영화라 어디서 보았는지, 전 여자친구와 보았는지, 지금의 아내와 보았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줄거리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뉴욕 할렘가에 살던 네 명의 소년과 작은 사고.
그리고 소년원, 그곳을 관리하는 교도관들의 부조리와 폭행, 성폭력.
성인이 된 소년들의 복수.
줄거리 요약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이만 글쓰기를 마치고 평온한 소파로… 죄송합니다.
이어가겠습니다.
이 영화는 화려한 출연진만큼이나 화제성도 풍부했다. 먼저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과연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었다.
원작자는 과거의 실제 사건을 토대로 집필했다고 주장했으나, 영화의 주 배경인 소년원과 법원 측에서는 그런 기록은 없다며 이를 부인했다.
실제 사건 여부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영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권선징악의 결과가 비교적 뚜렷한,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복수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점은 복수가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 끝에 갱단이 된 두 명의 친구는, 어느 날 우연히 술집에서 자신들을 괴롭혔던 교도관을 만나 그를 사살한다. 이것이 첫 번째 복수다.
두 번째 복수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신문 기자와 검사가 된 나머지 두 친구에 의해 설계된다.
그들은 친구들의 재판에 살아남은 교도관들을 증인으로 세워 끝내 그들의 원죄를 밝혀내고, 법의 심판대에 올린다. 총을 쐈던 친구들의 정당방위를 이끌어내는 것은 덤이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릴 것 같던 결말은, 범법자의 최후는 결코 평온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이 영화는 하나의 논쟁적인 질문을 던진다. 바로 소년 범죄의 ‘교화’ 가능성이다.
네 명의 주인공은 같은 사건으로 같은 처벌을 받았지만, 둘은 갱단이 되었고 둘은 번듯한 사회인이 되었다. 이를 두고 50%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은 영화처럼 단순하지 않다.
재범률을 떠나, 소년 범죄를 저질렀던 아이가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번 유명 배우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들의 사회 복귀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얼마나 매서운지를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사적 복수에 대한 정당성에 관해서도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다.
갱단이 된 두 친구는 교도관을 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총을 뽑아 사살했다. 그들에게 법의 심판대보다 당장 손에 쥐어진 총이 빨랐을 것이다.
< 법이 채워주지 못하는 정의의 공백 >
여기 사적 복수에 관한 작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중년의 여인이 있다. 그녀는 어릴 적 당한 성폭력의 기억으로 대부분의 삶이 망가졌다. 그리고 그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를 찾아 복수하게 된다.”
영화 줄거리가 아니다. 종종 사회면을 장식하는 우리네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결코 아름다운 결말을 갖지 못한다. 현실의 법치주의 사회에서 사적 복수는 또 다른 범죄로 기록될 뿐이다.
그리고 휘발성 강한 군중의 기억 속에, 그녀의 삶도, 가해자의 죄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마저 쉽게 지워지고 만다.
사적 복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시비비는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대중이 이런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어쩌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시작된 우리의 원초적 법치주의 DNA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소년 범죄로 돌아가 보자.
여기 또 다른 소년 범죄 이야기가 있다.
2025년 3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이 드라마는 총 네 편에 걸쳐 소년 범죄를 다룬다.
잠깐 주제를 벗어나 이 드라마의 특이한 점 하나를 소개해 보자면,
모든 에피소드가 컷 없이 하나의 테이크(one-take)로 촬영되었다는 것이다. 첫 화를 보면 경찰이 소년의 집을 급습하고, 체포한 뒤 경찰서 취조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끊김 없이 이어진다. 모르고 보게 된다면, 필자처럼 다시 돌려보게 될지도 모르니 부드럽게 넘어가는 화면 전환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연출의 흥미로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소년 범죄를 다시 곱씹어봐야 한다.
이 작품은 소년 범죄를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의 감정 변화,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의 시선,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쌓아 올린다.
그리고 청소년기의 내면적 갈등, 왕따, SNS 문화와 왜곡된 남성성까지 복합적인 사회 문제도 함께 펼쳐놓는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도를 거부한 이 드라마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명히 구분하면서도 결국 우리 사회 구조 속에서 누구든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종지부에는 가해자와 그 가족들의 시간을 비추며, 그들이 과연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어떤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아니,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년 범죄는 조금 결이 다른 고민을 요구한다. 미성숙한 시기의 잘못에 대해 우리는 ‘처벌’만큼이나 ‘재활’의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그들이 반성과 변화의 시간을 지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일. 그것이 결코 범죄를 용서하는 일과 같을 수는 없다.
여전히 세상은 유명 배우의 과거사 뉴스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소란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아픈 면을 드러내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툴다. 범죄를 향한 분노는 빠르고 정확하지만, 그 이후의 삶을 책임지려는 질문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슬리퍼스》가 불편한 이유는, 그 영화가 복수를 말해서가 아니다. 범죄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끝까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을 방치한 사회의 어두움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소년의 시간》이 끝내 답을 주지 못하는 이유도, 이 이야기들이 범죄로 끝나지 않고 범죄 이후의 시간을 우리에게 질문하기 때문이다.
중단 없는(one-take) 소년들의 삶처럼, 우리 사회의 감시와 책임도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한다.
슬리퍼스의 어둠과, 소년의 시간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사회만이 또 다른 소년 범죄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다.
과거를 책임지지 않는 민족에서 미래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