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나에게
오늘 나의 하루는 소모일까 성취일까
매일 출근길 회사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 내가 하는 생각이다. 사실 소모의 반대말로 정확히 어떤 단어가 설명될지는 잘 모르겠다. 축적? 습득? 이력? 성장? 평생 매일 출퇴근하고 주말을 기다리는 삶은 기존 사회를 지탱했던 보편적인 삶이었다. 그렇게 사회가 발전하고 어딜 가든 기술을 자랑하는 시대가 된 건 맞지만 즉, 사회나 국가적으로 보면 성장인데 그 속에서 개개인 또한 함께 '성장'했을까.
어쩌면 매일 반복되는 보고를 위한 보고, 별 의미 없는 회의,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 작성 등으로 컴퓨터와 문서함, 메일함은 이미 과부하다. 그 덕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데이터를 학습해서 인간의 영역을 도와주다 못해 대체하다가 결국 언젠가는 잠식할지도 모르는 세상이 왔다. 오늘 글이 다소 비관적으로 읽힐 순 있는데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내 정신은 맑다. 회사와 저녁 있는 삶을 건강하게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근하는 동시에 회사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에는 불가능했다. 퇴근을 해도 내가 오늘 했던 것을 복기하고 내일 해야 할 것, 남은 마감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과한 책임감인데 장기적으론 건강하지 못하고 어찌 보면 불필요한 인정욕구였을지도 모른다. 완벽해야 한다는 착각,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 일 못한다는 소리는 다행히도 들어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내 머리는 24시간 가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몇 년의 프리랜서 생활과 첫 직장 퇴사 이후 우리가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병폐에서 나 스스로를 구하고 복구하는데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올봄 프리랜서를 병행하다 다시 직장에 들어갔다. 이제 수습이라고 말하는 100일은 지났다. 아이가 태어나면 축하하는 100일 잔치, 연인들의 100일 기념 챙기기가 이제야 이해 간다. 100일, 즉 숫자 100이 주는 완성적 느낌과 더불어 3개월이라는 시간은 무엇가를 겪으며 인간이 본능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매우 크리티컬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꼬박 100일을 매일 험난한 지하철을 타며, 무더위와 일기예보가 민망할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장마를 지나 다시 새 조직에 안착했다. 에너지는 쓰이고 있지만 이제는 회사와 나를 분리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대견스럽고 안도감이 든다. 실수해도 괜찮고 아주 가끔 오타가 나도 괜찮다. 정말 모든 게 별일 아니다. 내가 횡령을 할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칠 배짱도 없으며,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실수로 누군가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일도 없고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니다. 나의 실수는 정말로 별일 아니었다.
이렇게 무언가에 초연한 태도는 실제 사회생활에서 내가 나를 보호하는 장치역할을 한다. 법도, 회사 내규도 아니다. 나의 초연함과 정신이 나만을 보호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떠한 사건이 발생해도 내 마음은 요동치지 않고 평온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는 상사 동료 후배가 있다면 마음속으로 되뇌어주세요. 저 사람 지금 마음이 힘들구나, 삶이 힘들구나 하고.
이렇게 초연해지기까지 나에겐 전 직장이 큰 역할을 했다. 요즘에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드라마에서만 보는 일이 아니구나, 버티지 못하는 내가 나약한 것일까, 왜 자꾸만 화가 날까,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해외에서 근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불가한,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특유의 조직문화로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퇴사를 결심하고 실행하는데 1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 원래의 명랑했던 나로 돌아가는데도 꼬박 1년의 시간을 썼다.
비로소 나는 나에게서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