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어 보이는 발걸음의 이유
카테고리 : 예술
이름 : 이것 역시 지도 / THIS TOO, IS A MAP
인스타그램 : @seoulmeseumofart
Part 1 방랑자의 뿌리
정처 없어 보이는 발걸음의 이유
내 가족, 내 고향, 내 나라라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다양한 선택지에서 나에게 최선인 것을 하나씩 골라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고향, 나라. 이 세 가지는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사람인지라 이 세 가지를 선택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단히도 선택하고, 바꿔 갈 수 있길 바랬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 저는 그것들조차 선택하고, 바꾸길 바랬었나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어렸을 적 저에게 가족이란 두려움, 절망, 포기, 분노였습니다. 술에 취해 할머니, 어머니, 누나 구분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 인해 매일 밤 숨죽인 채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곤 고작 그를 피해 도망 나와 누나들과 함께 손 붙잡고, 그가 잠들길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현실에 절망했고, 조각가가 되고 싶었지만 산산이 부서지는 누나의 조각상들을 보며 무언가 되길 꿈꿀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을 만든 아버지를 향한 분노만 가득했습니다.
큰누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고, 국내 어딘가로 간다면 잡으러 올까 두려워 그가 쫓아올 수 없는 ‘프랑스’라는 나라로 도망갔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곤 도망치는 것뿐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떠난 이후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누나들은 차례대로 성인이 되어 그곳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함께 그 긴 시간을 버텨온 친구 없이 나 자신만이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곤 고작 ‘일탈’하는 것뿐..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그렇게 가출했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혼자 남겨진 저에게 최선의 선택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두 달의 가출, 두 달의 무단결석, 두 달의 투쟁.
투쟁을 이어가는 제 모습을 본 담임 선생님의 권유 끝에 ‘전학’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긴 시간을 참고 견디고 나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막내 누나의 도움으로 서울이라는 곳에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내가 나로서 살 수 있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것을 보기 시작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제 영역을 넓혀가고자 노력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보니 나를 얽매고 있던 것은 가족뿐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남자로 태어난 이상 원치 않아도 폭력과 억압의 상징과도 같은 군대에 가야 했고, 이곳에서 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 저에게 또 다른 족쇄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리의 족쇄를 풀고 나아가고자 하니 다른 한쪽 다리에도 족쇄가 걸려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군대라는 곳은 저에게 가장 무서웠던 곳 같습니다. 폭력과 억압으로 가득했던 곳을 겨우 빠져나왔다고 믿었는데, 다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저에게 절망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입대 전 최대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경험하고자 했던 것들을 경험한 후 입대하고자 했고, 몇 개월을 아르바이트해 돈을 벌고 여행을 다니고, 다시 돌아와 일하고 떠나고 그런 생활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한 가지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동남아시아 싱가포르라는 작은 나라는 내수 인력이 부족하여 해외 인력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비자 취득 후 1년간 일하면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주권을 획득하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당시 저에게는 새로운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일을 하며 싱가포르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준비.
그렇게 600만 원이라는 돈을 모아 짐을 싸고, 가족에겐 한마디 말도 없이 저 멀리 싱가포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6시간을 날아 도착한 싱가포르는 따스한 날씨, 푸른 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새 삶을 시작하고자 했던 저에게 밝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21살이란 어린 나이로 떠난 싱가포르에서 삶은 사실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했기에 내 힘으로 직업을 갖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호텔 청소, 아파트 청소, 식당 설거지 등 타국으로 간 이민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여행으로 알게 된 친구 집 거실, 작은 매트리스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갔습니다.
몇 개월 후,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여 이사간 집에서 집주인에게 성적 유린을 당하기도 하고, 겨우 들어간 직장 대표의 원치 않는 애정 요구를 받아주면서도 내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싫게 느껴져, 참고 또 참는 생활을 하며 그곳에 뿌리내리고자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나온 지 1년쯤 되던 때, 직장 대표의 지속적인 애정 요구를 거부하고, 그곳을 그만두면서 가족과 고향은 떠날 수 있으나 ‘나라’는 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현실을 마주할 때라고 생각되어 다시금 짐을 싸고, 공항으로 발걸음 옮겼습니다.
내 가족, 내 고향, 내 나라. 버리고 떠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버린다면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가능성을 외부에서 찾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곤 저를 얽매는 것들뿐이었기에 내가 가진 것에 뿌리를 두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끝없는 방랑의 생활을 할 것만 같았는데,
36년의 생을 살아낸 이제서야 뿌리 내릴 곳을 찾은 듯합니다.
그것은 가족도, 고향도, 나라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Part 2 이것 역시 지도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주민의 꿈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것 역시 지도’ 전시는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나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의, 타의로 본인이 속했던 지리적 위치를 떠나온 이주민들은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곳에 정착해 살아가길 시도합니다.
원래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시작한 그들에게 세계 지도에 그려진 영토의 개념은 각 국가간 역사적 협약과 조약을 통해 정립되어 우리가 아는 지구본 위에 그려졌으나, 이미 자신의 땅을 떠나온 이주민들에게 영토 경계란 그저 다른 사람이 그어놓은 ‘선’으로 인식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국가간의 협약으로 만들어진 ‘선’이 아닌 다른 땅 위에 살아가며 만나고, 교류하며 때론 다시 떠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감정적인 소통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통해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이번 전시는 설치, 미디어, 회화, 조각, 드로잉, 직물, 벽지,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이주민들의 이동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그들의 의지, 소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지도 위 수많은 선들은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무수히 그어진 지구본 위 선 안에서는 다양한 민족, 인종,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교류하고 이동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전시를 통해 제가 어릴 적 가족과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위해 뿌리내릴 곳을 찾아 헤매던 제 ‘방랑의 여정’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폭력과 억압으로 쓰여진 삶을 바꾸고자 시작한 여정.
누구의 보살핌이나 가르침없이 시작한 여정, 혼자의 힘으로 시작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여정을 시작한 덕분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이어진 인연의 관계를 통해 현재의 제가 되었고, 그런 경험들 덕분에 내가 뿌리내릴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내년부터 우리나라도 OECD기준 다인종, 다문화 국가에 속하게 된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저는 제 가족, 제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진 못했지만 우리나라는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다양한 삶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에 있나요?
이 전시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다시금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언비트 에디터 천성민
언비트 매거진 인스타그램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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