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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씨아저씨 Jan 05. 2024

동역사에서 D.O를 만나다

2024. 1. 5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2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하 동역사)에서 4호선으로 환승을 하려고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첫 집 연대기'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동역사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출퇴근 시간에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왠지 세면대의 물이 배수관을 타고 이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원하게 잘 내려가면 기분 좋지만 이물질로 배수관이 꽉 막힌 것 같은 상태일 때가 대부분. 늘 기분이 별로인 상태로 대기할 때가 많다는 의미다. 


패션 잡지 에디터로 일했던 저자가 처음으로 독립해서 월셋집을 계약하고 집수리를 해가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서툴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으로 집수리를 해나가는 저자의 이야기에 묘하게 빠져들게 하는 마력의 책이다. 마룻바닥 깔고, 도배하고 욕실 타일작업을 마치고 집에 전기공사하는 이야기가 막 펼쳐지려던 참이었다.  


누가 뒤에서 그리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애매한 강도로 톡톡하고 두 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검지손가락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아는 척을 하기 위해 보내는 신호이거나 아니면 내가 바닥에 무엇이라도 떨어뜨려서 뒷사람이 부르는 신호다. 움칫하며 걱정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D.O였다. D.O는 우리 집에서 동거하고 있는 나와 성이 같은 첫째의 영어 이니셜이다. 혹시라도 EXO 도경수의 D.O.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학교에서 팀 회식하러 동대문 나왔다가 다시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친구들하고 같이 있었을 텐데 그래도 아빠를 아는 척해주니 기분이 좀 묘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이 무척 밝아보였다. 혹시나 아빠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나온 표정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을 3초 정도 했는데 애슐리 가서 배 터지게 먹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D.O는 말했다. 역시 헛된 기대는 금물이다. 


얼마 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친구랑 농구를 하러 가던 둘째 D.S를 만났을 때,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번쩍 들뻔하던 그 찰나에 D.S는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깔았다. 그때의 그 쪽팔림과 비교하면 D.O의 손짓은 영광이다. 


D.O는 잠시 후에 내렸고 나는 집으로 왔다. 매일 집에서 보는 사람이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만났을 때 주는 묘한 기분의 정체를 딱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불호보다는 호의 감정에 가까운 것 같다. 


오늘은 그런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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