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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노을 Apr 29. 2020

시작, 그 낯선 설레임

나의 시작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시작하게 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시작은 언제나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설레임과 같다. 성공과 실패의 중간 어느 지점 즈음에서 발걸음을 떼어야 하니 말이다. ‘시작’은 언제나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불안함이 때로는 엄습하기도 하지만, 걱정이나 염려보다는 터널 끝에서 날 반겨줄 밝은 빛을 생각하다 보면 그리 무서울 것도 없었다.





밑바닥 인생으로의 초대

주어진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을 열세 살의 어린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은, 그 아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앗아갔다. 적어도 그 이별이 영원한 것이라면.


아버지가 떠났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엄마를 괴롭히고, 우리 가정을 힘들게 했던 모든 시간들이 허전할 만큼이나 그 빈자리는 컸다. 미움도, 증오도,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도 모두 산속에 묻어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제 막 마흔이 된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와 아직은 아빠의 사랑이 필요했던 아들. 세상에 남겨진 둘은 IMF가 시작되기 한 참전, 경제적 어려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한참 체감하며 살아갔다.


어렵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로 존재했다.


내 안에서, 네 안으로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 동안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같은 반 친구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십시일반 쌀과 작은 봉투를 들고 집으로 찾아왔던 일이다.


한 반에 열여덟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학급의 친구들이 보내준 쌀은 사실 두세 번 밥을 지어먹으면 금방 동이 날 소량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친구들이 엄마에게 이야기해 쌀을 모았을 때에는 그 한 숟갈 한 숟갈이 쌀 한 가마니보다 큰 마음이었다는 것을.


그때를 시작으로 나의 삶은 늘 도움과 동정의 어중간한 사이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쯤, 그제야 나 자신만을 바라보던 삶에서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안에서’ 꿈틀대던 일들이 ‘네 안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산발적이긴 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주 조금씩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필요에 따라 돕기 시작했고,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이 참 행복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브엘라해로이,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는 잘 드러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와 평생을 함께 살아주기로 굳은 결심을 한 그녀를 볼 때 드는 생각이다.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내 역시 ‘내 안에서, 네 안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바라보는 일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한 이후에도 서로의 마음을 모아 주변을 슬그머니 돌아보는 일들을 지속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가르치고 담당하는 학생 중에 한 친구의 어려움을 듣게 되었다. 평소에 늘 밝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에 큰 생각은 없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뛰는 가슴만큼이나 나의 손과 발은 덜 움직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꽤나 불편했다. 홀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시절이 넉넉지 않았기에 한 부모 가정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한부모 가정이었던 나보다 더 어려운, 부모님이 없는 환경 가운데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치열함 가운데 내던져져 있었다.


‘도와야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내가 움직여야 한다. 가르침은 입 밖으로 던져내는 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친 그대로 손과 발을 움직여 행동하는 데까지다’


2019년 7월 1일, 낯선 설레임을 안고 나는 또 다른 시작의 출발선에 섰다. 주변 지인들에게 어설픈 홍보 문구와 포스터를 만들어 돌렸고, 주변 사람들의 고사리 같은 손길을 모아 후원 단체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브엘라해로이”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로 성경에 나오는 단어이다. 의미를 해석하자면, ‘God who sees me,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할지라도, 그 단어 자체가 주는 의미와 뜻에 깊은 감동과 울림이 있었다. 홀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자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2020년 4월 현재, 약 35명 정도의 정기 후원자가 생겼으며 한 번이라도 후원에 동참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약 4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후원 단체에 아름다운 손길을 뻗쳐주었다. 그리고 단체를 통해 후원을 받는 자들이 어느새 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행복한 일이다.


‘리즈너스’, 또 다른 낯선 설레임의 시작

건강했던 아내에게 생각지도 못한 아픔의 시련들이 찾아왔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 없는 질병으로 인해 직장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렇게 건강하던 아내가 병저 누운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한 아픔이 그대로 내게 전이되어 왔다.


그토록 바랬던 직장에 취업을 앞둔 전날 응급실에 실려가며 모든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맛보자, 이제는 그 어느 곳에서도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도와야 하지만, 우리도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치 않은 기회로 커피를 배우게 되었다. 문득, 인터넷 sns를 잘 활용하는 아내가 집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처음 아팠을 당시보다 몸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카페 사장님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와 자문을 구하고 커피 관련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놀라운 것은 인터넷으로 하는 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아내와 나는 뜬금없이 ‘소아암 환자 돕기’라는 소명(calling)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우리 가정이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또다시 더 어렵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즈너스’(Reason,us)

‘특별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삶의 이유가 있다. 그것이 어떠한 양태를 가지고 있든,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특별하다. 리즈너스에서 판매되는 모든 제품을 사용하기만 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되기 때문에 벌써부터 설레인다.


아직은 소아암 환자 가정을 만나보지는 못했고, 아직 리즈너스가 정식으로 물건을 판매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또다시 낯설게 설레이는 이 출발점에 서서 새로운 ‘시작’을 세상에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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