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아침에 적은 글을 뒤늦게 올립니다>
어느덧 다시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아이들에게 서둘러 아침을 먹이고, 교회에 가기 전 각자 해야 할 공부를 시킨 뒤 자리에 앉았다.
올해는 안타깝게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크리스마스는 조금씩 간소해진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축제의 날이 어느덧 여느 평범한 공휴일의 표정을 닮아간다.
친구들을 통해 산타의 존재여부를 반강제로 학습하게 된 이후, 머리맡에 놓이던 비밀스러운 선물 꾸러미가 사라졌다. 대신 올해는 각자 원하는 선물을 미리 고르게 했다.
첫째는 레고를, 물욕 없는 둘째는 실속 있는 현금을 택했다. 레고를 받아 든 첫째는 성격도 급하지,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에 이미 조립을 끝내버렸다. 주인공 없는 잔칫상처럼, 거실 한구석엔 이미 완성된 스타트렉 레고 피규어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유독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트리를 놓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안전을 핑계로 들였던 빈약한 벽걸이 트리와 창문에 붙인 구슬 전구가 전부였던 우리 집. 점점 색이 바래가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이것저것 재고 고르며 장바구니에 담았다 비웠다를 반복하는 사이, 크리스마스는 기어코 트리 없이 당도해 버렸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마을 전체가 들썩이는 거대한 축제였다. 딱히 놀거리도 즐길거리도 없던 그 시절, 명절이나 어린이날만큼이나 손꼽아 기다리던 날.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나. 선물 포장지에 붙은 문방구 스티커를 보고 산타의 정체를 눈치채기 전까지, 나는 진심으로 설레며 잠을 청하곤 했다. 교회에서는 이브날이면 아이들을 위한 과자 꾸러미를 한아름 안겨주었고, 온 동네 사람들이 교회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의 백미는 단연 재롱잔치였다.
어느 해인가 구둣방 할아버지에 관한 연극을 했는데, 운 좋게도 내가 주인공을 맡았었다. 꽤 길었던 대사를 외우느라 며칠 밤을 애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하다. 삐그덕거리는 마루 강단 위, 조악한 조명 아래서 잔뜩 긴장한 채 대사를 읊조리던 소년. 연극이 끝나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시던 외할머니의 얼굴... 모든 게 부족하고 투박했지만, 마음만큼은 더없이 풍족했던 겨울의 기억이다.
지금 각자의 방에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오늘의 크리스마스는 훗날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그저 학교와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빨간 날' 중 하나일 뿐일까.
내가 시킨 공부지만, 가끔은 이런 날조차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애처롭기도 하다. 하루쯤은 아무 생각 없이 놀게 해주고 싶다가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서 결국 또 모질게 마음을 먹는다. 어쩌면 이건 나의 서툰 교육 방식이 낳은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다.
눈은 오지 않지만, 쌀쌀한 공기와 환한 햇살이 교차하는 크리스마스다.
잠시 후면 교회에 가서 기쁨을 나누고, 점심에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특식인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이다. 오후에는 아이들과 마주 앉아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기억 속의 화려한 연극도, 거실을 밝히는 커다란 트리도 없지만, 소박한 이 시간들이 아이들의 마음속 뒷주머니에 작은 행복으로 저장되었으면 좋겠다.
아빠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서툴러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하고 풍성한 하루가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