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것과 살아내는 것 사이에서

나는 나의 길을 버티며 가련다

by 아저씨의 뒷주머니

오랜만에 좋은 장소에서 아내와 마주 앉아 고요히 커피를 마셨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향긋한 커피 향기 속에서 시작된 대화는, 물길을 따라 흐르듯 자연스레 직장 생활이라는 현실의 늪으로 흘러갔다.

아내에게 이미 털어놓았던, 최근 상급자와 나누었던 서글픈 평가 대화가 다시 화두에 올랐다.

나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만난 한 인물의 이야기를 꺼내며 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에바브로디토’.

디모데나 실라처럼 성경의 주연급은 아니지만, 바울의 곁을 묵묵히 지켰던 조연이다. 그는 옥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정작 본인이 죽을병에 걸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그는 ‘실패한 선교사’이자 ‘무능한 조력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그가 회복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했으며, 그를 ‘최고의 동역자’라 칭송하는 편지를 손에 들려 보냈다.

하나님은 결과가 아닌, 그가 임무를 다하려 했던 숭고한 과정과 마음의 궤적을 축복하신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건, 상급자가 내게 던진 ‘착하다’는 평가가 내내 독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말한 ‘장악력’이나 ‘독함’이 정답도 아닌데, 왜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한 나를 비참하게 여기며 자책했던 걸까.

사회와 조직은 우리에게 특정한 모습을 요구한다.

장악력 있는 사람, 독한 사람, 추진력 있는 사람.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규격품처럼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애초에 그런 규격에 맞춰 설계된 사람이 아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에바브로디토의 삶이 작은 깨달음으로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 상사와 다른 결의 사람이며, 주변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나의 방식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확신. 지난 한 해, 내게 주어진 과정에 한 점 부끄럼이 없었기에 ‘나는 그냥 나의 길을 가련다’라고 생각했노라 아내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던 아내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 역시 승진이나 평가가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저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인데, 왜 우리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가스라이팅 당하며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연말의 공기가 더 차갑고 싫다던 아내의 말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맞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 부부는 야망이 부족하거나 무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가 매 순간 맡겨진 삶에 얼마나 최선을 다해왔는지.

다만, 그 확실한 진실 앞에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현실은 늘 무겁게 어깨를 누른다.

그래서 우리의 지향점과 세상의 요구가 다름에서 오는 그 깊은 괴리를, 우리는 그저 견디고 또 견뎌낼 뿐이다.

허먼 멜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분명 ‘살아내기’보다 ‘견디기’에 가깝다. 이 삶을 포기할 수 없어 견디고, “이곳을 떠나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없어 또 견딘다.

이 인내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일지, 혹은 이런 마음 자체가 오만한 자만심은 아닐지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다가올 해에는 새로운 기반을 닦아보려 한다.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날 수 있는 나만의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은 내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기제다.

떠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순간, 이 견딤은 비로소 ‘비 자발적인 인내’에서 ‘능동적인 선택’으로 바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머무는 것이 된다면 이 시간의 질감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현실의 정답은 결국 ‘존버가 승리한다’는 비릿한 진리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모레도, 쓰디쓴 커피 한 잔에 마음을 녹이며 또 견뎌낼 것이다.

에바브로디토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듯, 나도 나만의 소중한 과정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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